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ily 케일리 Jan 28. 2023

어쨌든 푸짐한 일제강점기 영화

영화 <유령> 리뷰

한때 개봉 날 못 보면 그 영화는 아예 안 보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들의 평을 먼저 듣고 기대치가 달라지면 그 영화를 온전한 내 시각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거 재미없다던데..."라는 수많은 혹평 속에도 OTT 아닌 극장이 그리워서 영화 한 편을 예매했다. 그렇게 큰 기대 없이 본 영화가 <유령>이다.


<유령>

“유령에게 고함. 작전을 시작한다”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인 ‘유령’이 비밀리에 활약하고 있다.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카이토는 ‘흑색단’의 총독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 조선총독부 내의 ‘유령’을 잡으려는 덫을 친다. 영문도 모른 채, ‘유령’으로 의심받고 벼랑 끝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쥰지, 암호문 기록 담당 차경,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 암호 해독 담당 천 계장, 통신과 직원 백호.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뿐. 기필코 살아 나가 동지들을 구하고 총독 암살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유령’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 사이, 의심과 경계는 점점 짙어지는데…

과연 ‘유령’은 작전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성공할 때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


원작 소설 제목도 <유령>이 아니라고 하니, 여러모로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섭>에 비해 접하는 광고량이 현저히 적다. 아무 정보 없이 제목만 처음 들었을 때 호러 스릴러물인 줄 알고 거를 뻔했다. 인지도가 낮은 상태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제목이 더해지니, 이렇게 놓친 관객이 있을 걸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더군다나 배우들의 일본어 발음도 논란거리가 됐는데, 일본어를 못하는 관객들도 가장 쉽게 주목하는 게 <유령>의 발음이다. 물론 감독 인터뷰 덕에 현지인이 발음을 완벽히 했다는 사연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로 인해 듣지 않아도 될 비판을 들은 것 같아 좀 안타깝다.


영화는 '스파이 찾기'라는 큰 줄거리 안에서 처음부터 이하늬가 유령임을 던져준다. 그 덕분에 관객은 이하늬의 시선을 따라감과 동시에 '추리물이 이렇게 쉽게 답을 줄 리 없는데, 유령이 더 있겠지?'라는 기대감을 안고 나머지 출연진을 바라본다. 추리가 도드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추리와 이하늬의 고군분투가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각 등장인물이 기대 이상으로 특이하고 특별했다.


캐스팅과 장르라는 재료를 줬을 때, 암묵적으로 모두가 예상하는 템플릿이 있다.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에서 제1 주연은 독립운동가일 거라는 생각, 이하늬가 여자 독립운동가로 공개됐으니 주연급 남자 배우 중 독립운동가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 심지어 설경구가 연기한 쥰지의 어머니가 조선인이라는 설정이 밝혀지며 당연히 그가 유령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는 설경구가 악역인 것도 모자라, 유령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가 아님이 밝혀지는 이중 반전을 선보인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대서 도끼를 안 믿었는데, 도끼도 이제 도끼 아닌 척을 하나 보다. <암살>의 이정재 이상으로 신선했고, 쥰지의 비중에 비해 더 큰 인상을 남겼다.


시종일관 반려묘만 걱정하는 서현우의 천 계장도 <유령>이 부순 템플릿 중 하나다. 암울한 시대 배경 속 인물들은 죄다 비장하고 진지하다. 그런데 모두가 목숨 바쳐 신념을 지키든 말든, 천 계장에게는 고양이 하나짱뿐이다. 애국과 고양이라는 이질적인 세계관의 충돌은 무게감 있는 영화에 숨통을 만들고, 메인 캐릭터가 넘치는 작품 안에서 천 계장의 존재감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영화가 끝난 후 "그래서 하나짱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천 계장이 현실감을 더했지만, <유령>은 이를 다 묻어버릴 만큼 '영화적인' 면이 있다. 주인공들의 목숨이 너무 질기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가 완벽한 해피엔딩이길 기대하지 않는다. 적당히 제 할 일을 마친 후 떠나면 애도할 준비가 되어있다. 물론 모두가 살아남아 임무를 완수하는 판타지가 마냥 싫은 건 아니다. 문제는 인물들이 영리하게 살아남는다기보다, 불사조에 가깝게 묘사되었다는 데 있다. 수없이 얻어맞은 설경구의 얼굴은 너무 빨리 말끔해지고, 모진 고문에 정신도 못 차리던 박소담이 몇 시간 만에 유령 대원들을 구하러 간다. 총 맞은 김동희는 박소담이 박해수를 공격하고 자신이 건물 밖으로 구출될 때까지 살아남아 이하늬에게 사과를 건넨다. 이들의 죽음이 지연된 만큼 개연성도 비례하게 줄었다.


죽어야 했던 인물들이 살아나며 극에서 다룰 이야기도 길어졌다. 호텔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추리물로 활약하던 영화는 동지들을 구해야 한다는 미션 때문에 무대를 옮긴다. 이와 함께 장르는 추리에서 액션으로 바뀌고, <유령>의 궁극적인 주제가 뭐였는지 혼란스러워진다. 1막, 2막으로 나눠서 보기엔 극적인 총독 암살 장면만 봐도 전반부에 비해 힘을 뺀 후반부다. <완벽한 타인>과 <암살>, 그리고 <걸캅스>가 중심을 못 잡고 섞인 듯하다.


다소 산만해도 <유령>은 전반적으로 재밌는 영화였다. 차린 게 김밥, 케이크, 스파게티여도 진수성찬은 진수성찬이니까. 독립운동가, 액션, 추리, 미장센과 매력적인 인물들까지 재미 요소를 다 가진 작품이다. 삼일절과 광복절에 떠오를 영화 대열에 끼지 않을까? 무엇보다 시대 배경이 확실한 영화에서 각 캐릭터를 인상 깊게 남겼다는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나라 되찾으면 담배나 끊을까.

더 맛있어질 텐데, 왜.


때로는 오색찬란 무지개보다 한두 개의 포인트 컬러가 더 매력 있음을 일깨운 영화 <유령>. 그럼에도 이들의 진수성찬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붉은색, 푸른색 그사이, 그 짧은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