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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Mar 04. 2021

사진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당신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1.


"독일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짧은 질문에 오래도록 밤잠을 설치던 때가 있었다. 적당히 그럴듯한 대답을 찾으려고 구글링을 한 적도 있다. 어쩌다 누군가의 대답을 골라봐도 타인의 동기에 이어질 근거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를 평가하는 위치 있는 이들에게 솔직했다.


"한국에 소수자로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어려움과 인종차별의 위험에도 태어나고 자란 사회를 떠나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2.

어떠한 단어로 정의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즈비언이라던가 바이섹슈얼이라던가 퀴어 같은 단어를 멀리 해왔다. 어떤 개념 안에 편입되고, 하는 작업과 행위 하나하나가 '성소수자 작가'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싶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또 다른 인격체를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해보지 못했다. 개별적인 존재로 개인적인 문제로 안고 살아온 시간이다.


3.

누군가의 카메라를 통해 비취지는 혹은 타인들의 언어로 전해지는 당신들의 삶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당신들의 죽음까지 보았다. 단상 위에 선 당신들의 사진을, 거리에 앞서 행진하는 당신들의 이미지를 보았다. 하염없이 응시했다. [속보]로 분류되어 전해진 소식에는 마치 증명사진처럼 보고 또 봤던 사진만 느긋하게 걸려있다. 아무리 바라봐도 사진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 선택을 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어떤 감정을 끌어안고 살았는지 말이다.


4.

벗겨진 소수자들의 사진을 싫어했다. 그러한 사진들이 도대체 어떻게 기능하는 것인가. 그 사진들이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향해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침묵하는 사진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계속해서 전시되어야 하는 것일까.

애써 억눌러온 질문들이 당신들의 죽음으로 다시 터져 나온다.

이 모든 생각이 회피인가 변명인가 하는 것들 까지도. 질문 속에 파묻혀 무력함을 느낀다. 그 수많은 사진과 행위도 당신들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사회는 손에 잡히지 않는데, 사회적 차별은 살갗을 파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 어떤 말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무력감이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5.

그들을 심정과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설득의 말은 사실 큰 힘이 없다. 그저 언젠간 당신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장 크게 와 닿을 것이다. 다수에게서 떨어지는 공포. 그것이 수많은 폭력에도 방관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내가 아니니 안심할 수 있는 것. 내가 아니기 위해 혐오를 끌고 가는 것.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가하는 폭력까지. 그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오직 소수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6.

처음에는 그저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작은 해프닝에서 시작됐다. 컴퓨터가 없었으니 메신저를 이용할 일도 없었고, 그 안에서 사용하는 은어를 익혔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게 한 명이 거부감을 보이자 짜기라도 한 듯 나를 피했다. 전학 온 낯선 사람, 또래의 은어를 모르는 사람. 시작은 그것뿐이었다. 피하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따돌려져야 할 이유는 늘었다. 전따(전교생에게 당하는 왕따)와 같은 빌라에 살아서, 부모님이 세탁소를 해서, 소변에서 당뇨가 검출되어서 등등.


7.

"오빠, 저 사람 봐봐. 여자일까 남자일까?"

"ㅋㅋㅋㅋㅋ"


2008년 지하철에서 들은 말이다. 그렇게 나는 귀가 없는 존재가 되어, 당신들의 속닥거림이 된다. 개인의 가치관과 자유는 중시되어야 하지만 혐오는 자유가 아니다. 폭력이 자유로 취급되지 않듯, 혐오는 정당화될 수 없다.


8.

이토록 긴 자기 고백 뒤에도 나는 여전히 소수자의 삶을 사진으로 찍어볼 생각이 없고, 나의 정체성이 개념들로 정의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당신들의 죽음에, 노력에 분명히 반응한 것은 혐오에 대한 반감이다. 그 어떤 것도 혐오하지 않길 바라는 유토피아적인 바람이다.


9.

유학 생활의 끝이 보이는 요즘에는 전과 다른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학업을 마치고는 어디에서 살고 싶어?"


여전히 답을 헤매던 나에게 당신들의 삶은 작은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나는 꼭 한국으로 돌아가 혐오를 마주하고 또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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