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릭 페지스 Emerik Feješ
컬러는 유용한 도구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이보다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파고드는 것이 있을까? 일상에서 컬러는 종종 취향의 문제로 다뤄지지만 미술, 광고, 디자인 전반에서 컬러는 힘을 갖고 있다. 단순히 색 하나의 문제는 아니다. 어떤 조합으로 이뤄졌는지에 따라 따뜻한 느낌을, 차가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느낌'이란 다분히 주관적인 감정을 색의 조합만으로 일관되게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에머릭 페지스(Emerik Feješ)의 그림은 첫인상부터 유쾌했다. 돈 없는 키덜트인 나는 곧바로 장난감 세상을 떠올린 듯하다. 그가 그린 풍경에는 사실처럼 그리겠다는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2차원 종이에 그대로 2차원 세상을 그려냈다. 그리고 원본 풍경에서 볼 수 없는 색을 꼼꼼하게 입혔다.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던 첫 번째 흥미로움은 바로 '아는 건물'의 재발견이다. 그의 그림에는 익숙하지만 독특하게 재현된 도시들이 펼쳐져 있다. 그의 손에서 재탄생된 도시와 건축물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두 번째 흥미로움은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엽서에서 왔다는 점이다. 그는 취미로 모은 흑백 엽서를 카본 종이에 확대해 그렸고, 그곳에 상상을 조금씩 더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고, 병치레가 많았던 예술가. 그가 볼 수 있었던 세상은 그토록 제한적이었음에도 상상 속의 색채로 그려낸 세상은 빼어나게 화려하다. 흑백의 도시에서 그가 찾아낸 색채. 예시로 에머릭 페지스의 빅벤과 실제 빅벤을 비교했다. 실제로는 붉은색, 갈색 벽돌로 이뤄져 무게감과 고풍스러움이 느껴지지만, 그는 붉은색과 갈색을 핑크와 옐로로 표현해 발랄함과 따뜻함이 강조했다.
어쩌면 진경 산수화의 저 반대편에 있는 이미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왼쪽 그림은 에머릭 페지스의 'Notre Dame Cathedral in Paris, around 1962'이고 오른쪽 사진은 2015년 직접 촬영한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다. 온통 하나의 색으로 이뤄진 건물은 그에게 빈 도화지 같은 느낌이었을까. 그의 그림은 직접 보지 못한 풍경을 보고 싶게끔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이 도시의 색은 원래 어떤 느낌일까'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삐뚤빼뚤한 선과 어딘가 어색한 구도.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 같기도 한 이미지들. 지극히 평면적이다. 이 말인즉슨 이미지에 소실점과 원경의 변화가 없다. 아마도 아카데믹한 드로잉 기술을 배운 적 없기에 그럴지도. 하지만 똑같은 기술을 단련해 그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일반적인 화가들과 다른 매력이 있다. 기우뚱하지만 중심을 잃은 모습은 아니다. 그 점이 세 번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그는 화가로 활동을 시작한 것도 45세가 되서였는데, 다른 나이브 화가와 달리 생전에 빛을 본 케이스다. 1904년 생으로 1969년에 사망한 작가인데도 그가 입힌 색은 21세기의 한국인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색은 분명히 세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힘이 있다.
레고로 쌓아 올린 듯한 이미지. 장난감 같은 색채.
현대인들은 참으로 여행을 많이 다닌다. 똑같은 카메라를 들고, 똑같은 거릴 걷는다. 누군가의 글에서 '구글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사진들을 왜 굳이 찍으려 할까'라는 발언을 보고 감탄했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도 그렇게 여행해왔다. 유명한 건축물과 거리에서 누구나 찍을 법한 사진들을 담아왔고, 블로그에 하나 둘 올리거나 지인들 가족들에게 전송하는 사진들.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미지만을 담아왔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 그의 작품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이 도시를 나만의 방법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시를 기억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도시와 건축물은 사람의 손에서 태어나 인간의 일생을 함께하고, 사람들의 역사와 함께 기억된다. 서로 다른 위치와 시야에서 서로 다른 색과 분위기로 파악되기도 한다. 한국인이 바라보는 크로아티아, 독일인이 바라보는 크로아티아는 서로 다를 테니까.
더불어 한 때 페이스북을 떠돈 재미있는 사진이 떠올랐다. 온라인 지도로 여행을 한다던 사람의 글이었는데 지도 제작자들이 열심히 담은 3D 이미지를 통해 실제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을 집에서 클릭만으로 모두 볼 수 있다던 독특한 발상의 글. 그렇다. 디지털은 아날로그 사진이 할 수 없던 가상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얼마든. 우리는 에펠탑의 모습을 집에서 구경할 수 있다. 이미지는 그렇다. 하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여행을 가는 이유가 아닐까. 그곳만의 분위기를 향기를 소리를 경험하기 위해서. 아무튼 집에서 가상 지도로 휴가를 보낸다는 그는 어쩌면 이 시대의 페지스 같은 사람이 아닐까. 작가까진 아니라도 적어도 그런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나 역시 드레스덴에서 지내다가 한국으로 온 뒤 그리움을 구글 맵으로 달래던 적이 있다. 내가 늘 걷던 길을 지도로 걸으며 말이다. 세상이 참 좋아진 덕이다. 사진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라면 가상 이미지를, 구글 맵과 같은 가상현실을, 해시태그만 검색해도 끊임없이 나오는 도시와 건축물의 복제 이미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에머릭 페지스 Emerik Feješ
1904년 출생, 1969년 사망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 위치한 나이브 아트 미술관에서 만남
* 과거 운영하던 티스토리 블로그의 글을 일부 참조했습니다. http://keineahnung.tistory.com/49 [잡스러움이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