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투수의 등판
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하고, 졸업 후 자영업, 제작 프로덕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던 어느 날.
동기이자 동생이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회사 다니는 고충을 늘어놓아 몇 번 전화를 피했었다. ‘내가 왜 이 얘기를 들어줘야 해?’ 라는 생각이 들수록 피하는 빈도는 잦아졌다. 그 뒤로는 밑천이 바닥났는지, 고충보다는 자기 회사에 입사를 권유했다. ‘그렇게 실컷 회사 욕하더니, 나보고 거길 들어오라고?’, ‘이거 원, 군대 끌려가는 것보다 더 가기 싫다’ 생각했다. 허나 마땅히 직장을 찾지 못했기에 제안 자체는 고마웠다. ‘배운 도둑질을 한 번은 써봐야 하는데’ 취직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형, 다른 게 아니고 우리 프로모션 하는데 알바로 잠깐 일해볼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는지, 인력을 구하기가 급했는지, 의외로 용건은 간단했다. “생각해볼게”라는 대답에 인천의 고급 호텔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페이도 세다고 덧붙였다. “일이야 간단하고, 형 경험이 많으니까 대표님한테 페이 더 올려달라고 할게”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서 띵가띵가 노는 것보다 돈 버는 게 나으니까 아르바이트를 나가기로 했다.
업무는 스포츠 브랜드의 골프장 프로모션 진행. 골프장 클럽하우스 앞, 가장 유동인구가 많을 곳에 컨테이너 부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제품을 디스플레이해 특가로 판매하고, 이벤트를 열어 고객들을 집객 하는 프로세스. 어려울 건 없었다. 브랜드 담당 매니저가 제품에 대해서 안내하고 나는 이벤트 고객 안내와 하루 한번 진행되는 ‘선수 사인회’ 때 고객들이 엉키지 않게 현장 정리를 해주는 정도였다. 목요일 예선부터 일요일 결승까지 4일 일정으로 진행되고, 중간중간 가까운 홀에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첫날, 6시 경기가 끝나 컨테이너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고급 호텔이라던 곳은 말이 호텔이지 번화가 밀집 모텔촌의 저렴한 숙소로 변해있었고 그곳이 우리가 4일을 지낼 곳이었다. ‘그럼 그렇지’ 입만 벌리면 거짓말인 그를 크게 믿지도 않았다. 중요하지도 않았고.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열고 연신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에 저녁을 먹고 맥주를 한잔했다. 회사에 먼저 입사한 학교 후배와도 오랜만에 얘기를 나누었다. “선배님, 저희 회사 오실 거예요?” 다짜고짜 묻는 그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팀장인 동기가 말을 덧 붙였다. “형, 내일 현장에 회사 대표님 오실 거야”
금요일이 되자, 인파는 더 많아졌다. 주말로 갈수록 하이라이트로 치닫는 게 골프 대회라고 브랜드 매니저가 일러주었다. 오후가 되자, 브랜드 매니저 팀장과 회사 대표가 함께 현장에 나타났다. 가볍게 인사를 하니, “팀장에게 얘기 많이 들었다, 이번 대회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 대표는 꽤나 젊어 보였고 이전에 광고 에이전시에서 10년 정도 일하고 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너무 힘들게 일하는 환경이 싫어서 업계 문화를 바꿔보려 한다’는 그의 말에 조금 다른 사람이겠거니 했다. 광고업계가 일 많고, 스트레스 많고, 야근 많은 대표적인 하드잡인것은 워낙 유명하니까. 그리곤 나에게 이래저래 자기소개와 포부를 얘기했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와 대화를 나눌 때, 멀리서 팀장은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대표와 얘기가 끝남과 동시에 곧장 와서 무슨 얘기했냐며 캐물었다. 별 얘기 안 했다고, 네가 다 아는 그런 얘기라고 말했다. 누가 자기 욕하는 줄 아는 건지, 그는 모든 얘기를 다 듣고 싶어 해 보였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아’
둘째 날, 아침 일찍 컨테이너를 오픈하고 제품의 디스플레이를 점검했다. 어제 한번 해본일이라 그런지 훨씬 수월했다. 돌아가는 프로세스를 빨리 파악하고, 중요한 것을 순서대로 처리한다. 나만의 일하는 방식을 어김없이 적용했다. 유명 제품 선글라스를 추첨으로 준다는 이벤트함에는 우승선수를 맞춰 상품을 받으려는 고객들의 응모지가 꽉 차고 있었다. 후원 선수의 사인회도 문제없이 마치고 컨테이너를 닫고 숙소로 돌아갔다. 약속한 듯 씻지도 않고 모두가 침대에서 곯아떨어지게 잤다. 외부에서 고객들을 안내하고 스케줄에 맞추어 진행하니 생각보다 신경 쓸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팀장이 왜 나를 찾았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이 날도 어김없이 저녁상에 반주를 곁들였고, 씻고 베개를 베자마자 딱딱한 매트리스로 몸이 가라앉았다. 첫날보다 시간이 빠르게 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