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끝은 또 다른 운명의 시작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읽기

by 먹구름이

나는 세상의 끝까지 온 것이었고 그 너머로는 바람과 파도, 중국 해안까지 곧장 이어진 공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은 주인공 마르코 스탠리 포그가 기이한 청춘의 한 여정을 마치고 세상의 끝에 섰다가 다시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포그는 어린 시절 삼촌과 함께 살았다. 그는 대학시절 삼촌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삼촌이 남겨준 수많은 책을 읽으며 재산을 탕진, 자신을 점점 굶주림의 끝으로 몰아세운다. 처음엔 수중의 돈을 다 써버리고 이후 세를 내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그렇게 노숙자가 된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방황을 계속하다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되고, 영양실조와 탈수 증세로 공원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죽음에 문턱에 이를 지경이 된 그는 때마침 그를 찾던 친구와 중국계 여자친구 키티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다. 이후 키티와 사랑에 빠지고 그 무렵 친구 집에서 나와 숙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에핑이란 노인의 집에 머물며 그의 심부름이며 몇 가지 일을 수행하게 된다.


에핑은 매우 괴짜 노인이었다. 장님에 다리 불구로 신체 제약이 많은 그는 포그에게 책을 낭독하게 하거나 산책을 나가 주변 풍광을 매우 세세히 묘사하도록 시켰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에핑이 포그를 고용한 목적은 자신의 부고기사를 신문에 싣기 위해서였다. 에핑은 포그를 자신의 눈과 다리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포그는 이야기를 들으며 글로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포그는 에핑이 젊은 시절 줄리언 바버라는 화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핑이 서부 여행을 하던 중 한 사건을 겪으며 토머스 에핑이란 전혀 다른 이름의 사람으로 살게 된 기이한 사연을 듣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포그는 에핑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고 그의 방식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부고기사와 자서전 원고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반면 부고기사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에핑의 죽음은 다가왔다. 에핑은 마치 자신이 죽는 날도 알고 있는 듯했다. 에핑은 포그에게 자기 재산 중 일부를 불특정 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계획을 실행하게 한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친 후 에핑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자신이 정한 날짜에 숨을 거둔다.


에핑의 드라마틱한 죽음을 모두 지켜본 포그는 그동안의 일을 마무리하고 여자친구 키티에게 돌아와 둘은 함께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에핑의 유언으로 에핑의 아들인 바버 교수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받은 제안으로 미 서부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바버가 포그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포그는 아버지의 존재여부조차 잘 알지 못하는 사생아로 자라왔다, 여행 중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 포그는 놀라움과 동시에 분노감을 느끼며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바버를 우발적으로 밀치고 그 일로 바버는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다가 몇 달 후 죽고 만다. 그사이 포그는 사랑하는 여자친구 키티와도 헤어진다. 세상에 다시 혼자가 된 포그는 큰 혼란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바버와 함께 하기로 했던 에핑의 동굴 찾기를 집중했고 동굴이 있던 자리라고 여겨지는 장소를 찾게 된다. 하지만 그곳이 이미 수몰된 곳이라는 걸 알고 허탈해한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그는 정처 없이 서쪽을 향해 방랑을 한다. 그리고 결국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는 라구나 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또다시 새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 책 속에서 포그의 방황은 극단적인 기아 경험, 의외의 인물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끝을 향해 치닫는 방랑 등으로 그려진다. 그의 방황은 막연해 보이지만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 속에서 그는 기아라는 인간의 근원적 본질을 체험함으로써 나약한 자아를 발견하고, 우연한 기회에 키티나 에핑 등 기묘한 인연을 만나며 사랑과 인생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에핑을 알게 되며 이후 혈연의 끈으로 확인된 바버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은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을 마친 그 앞엔 공허함과 바람이 부는 망망대해뿐이다. 그렇다. 모든 것을 겪었다며 인생의 한 고비를 넘었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역설이 바로 인생이 우리에게 건네는 교훈이 아닐까. 세상 끝날 것 같은 일을 겪었거나 그런 일을 겪고 있는 중이라도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이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고 한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진짜 인생을 다 모르고 하는 얘기일 수 있다. 끝이 진짜 끝이 아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있을까.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더 나아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방향성이 아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게 우리 삶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데서 우리는 어쩜 모두 작가가 되고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바라는 해피엔딩도 가능하고, 감당만 한다면 슬픈 새드무비나 비극적인 서사시를 만들 수 도 있다. 중요한 건 해피엔딩이나 새드무비나 어떤 삶이든 던지는 메시지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계속되는 삶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감당하는 것이 인간 된 도리로서 내 임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편견 중 하나는 흔히 누군가 뭔가 큰 사고나 사건을 겪거나 큰 방황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인생은 완성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드라마나 소설을 많이 접한 영향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사람의 삶은 영화나 소설처럼 기승전결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름대로 도식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삶은 어쩜 맥락이 없이 기승전일수도 기승, 또는 기도 못해본 삶이 수두룩 할 수도 있는데, 또 기승전결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기승전결이 기다리고 있는 게 삶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내 생각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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