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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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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영 Jul 21. 2021

미치지 않고서야 고양이를 구할 리가


 파괴적인 재난이 주인공을 덮치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까. 몸을 던져 재난을 막거나, 사람들을 대피시키거나, 하는 답을 생각하기에 십상이나, 썩 매력적인 답안은 아니다. 사선을 조금 돌려, 나무 위에서 떨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자. 주인공은 망설임 없이 나무에 올라가 고양이를 구하고 내려온다. 그 급박한 상황에 말이다. 시청자, 혹은 관객은 생각한다. 이놈 뭐지?

 세계적인 시나리오 작가 블레이크 스나이더는 이러한 장면을 일명 ‘고양이 구하기’ 장면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캐릭터를 매력 있게 만드는 것은 비싼 옷도, 매혹적인 외모도, 고급스러운 억양도 아니다. 캐릭터를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단순하고도 엉뚱한 단 한 장면만이 캐릭터를 매력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는 고양이 구하기의 표본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격변하는 직장 생활 속 직장인들의 처절한 생존기를 다룬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의 네 주인공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엉뚱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마구 뽐낸다. 


은은한 미소 속 숨겨진 강단최반석

 뛰어난 엔지니어링 능력을 지닌 반석은 우연한 계기에 인사팀에 발령받는 인물이다. 너무 차갑지도, 너무 뜨겁지도, 너무 열성적이지도, 너무 건성이지도 않은 그는 겉보기에는 밋밋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특유의 온순한 강단과 겸손한 자존심으로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인사팀 팀장 당자영과 처음 마주하는 순간, 그는 탕비실로 무알콜 맥주를 옮기고 있는 모습을 들킨다. 원칙은 지키자며 무섭게 몰아붙이는 자영에, 반석은 네, 하는 대답을 하면서도 중얼거리며 변명을 잃지 않는다. 어이없는 듯 눈을 부라리는 자영의 기세 앞에서, 그는 조금 위축되는 듯하면서도,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까지 중얼거리는 변명을 잃지 않는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영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온순하고 융통성 있는 인물로만 비추어졌던 반석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걸크러쉬+인간미당자영

 인사팀 팀장 자영 역시 매력 하면 질 수 없는 캐릭터다. 일에 미친 듯 보이는 그녀는 짧은 기간 팀장으로 승진하여, 지방 사업부에 발령받게 된다. 해고 정리 차 지방 사업부에 들른 자영, 그녀의 눈앞에 반석이 나타난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회사 꼴에 잔뜩 화 나 있는 그녀에게, 무알콜 맥주를 한가득 안고 들어와, 심지어 자신에게 한 캔 권하기까지 하는 반석은 곱게 보일 리 없다. 눈을 부라리고 화를 내 보아도 전혀 위축되어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은 화를 부추길 뿐이다.          


 여기까진 별 특별할 것 없다. 완벽주의자, 워커홀릭. 여느 드라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반전은 반석이 탕비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원칙은 지키자며 눈에 불을 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맥주 캔을 따고 냅다 들이키기 시작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철함을 지닌 자영의 인간미에 시청자는 빠져들 수밖에 없다.      



미워할 수 없는 빌런한세권

 자영에게 숨겨진 반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사업부 팀장 한세권과 이혼한 사이라는 사실이다. 잘생긴 얼굴에 화려한 언변으로 사업부 내 엄친아로 통하는 세권은 이 드라마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의 화신인 세권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쟁취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일면 완벽해 보이는 그는, 생각지 못한 허점과 공백으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매력을 뽐낸다. 로봇 청소기 공식 테스트 전날까지 풀리지 않는 오류를 두고 고민하는 세권, 반석은 생각보다 무척 간단한 방식으로 오류를 풀어낸다. 학벌은 좋지만, 일머리는 없는, 세권의 의외의 허점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반석에게 위기감을 느끼며 그를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는 세권을 보며 시청자는 분노하지만, 

오너 그룹과 친인척이면서도 오너 패밀리에 끼지 못하는 열등감을 보이는 부분에서는 동시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그를 동정한다. 밉지만 일면 안쓰러운 빌런, 세권에 이입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 세상 당당함이 아니다서나리

 이런 세권이 든든한 백이 되어주는 존재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상품기획팀 선임 서나리이다. 외모부터 학벌, 실력 그리고 집안까지,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나리는 세권과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 경력이 많고 직책이 높은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MZ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된 까닭에 자칫 그 존재감이 옅어지고 극의 흐름에 녹아들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나, 누구보다 당찬 나리의 자신감은 그녀의 존재감을 톡톡히 부각한다.          

 특히나 세권과 그의 전처 자영이 같이 있는 모습을 포착한 나리는 귀여운 질투를 하며, “말씀 길어지실까요?”라는 뼈 있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처절한 직장인의 생존 일기 속에서, 누구보다 당차고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는 직장인 나리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은근한 사이다를 선사함과 동시에 느슨해지는 극의 분위기에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감초 역할로서 나리가 빠질 수 없는 이유이다.     

 각자의 방식대로 처절하게 살아가지만, 그 속에 나름의 개성과 속사정을 지닌 네 명의 인물은 특유의 매력으로 안방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자칫 꺼려질 수 있는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는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을 통해 리얼리즘 드라마의 지루함을 극복하고 극의 흐름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든다. 네 명의 캐릭터는 앞으로 어떤 ‘고양이 살리기’ 장면을 보여줄까. 수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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