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직장과 직업

-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게 당신이 선택한 결과이길 바래

by Kelly Kenye Kwon

친구와 나는 20년이 넘었다. 1학기만 다니고 자퇴한 대학교 1학년 때 만났고, 이제 21년째가 되어간다. 14년째 같은 회사를 다니는 그 친구, 그리고 14년 째 10번의 퇴사와 입사를 반복한 나는 서로의 needs가 잘 맞아서 간헐이나마 만남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번에 서울 본사에 일이 있다며 올라와서 나를 보고 가겠다고 논현동에서 한시간 넘게 기다리는 중이다. 항상 이런식이다. 나는 매번 회사에서 바빴고, 그 친구 입장에서는 매번 처음 듣는 회사 근처에서 기다렸다. 비싼 양고기 집을 갔다. 둘다 편안한 만남이 오랜만인지라 가격 부담없이 이것저것 시켜댔다.


"야 아직도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냐"

"응..."

"금요일 이시간까지 일하고, 너는 맨날 그렇게 일하고 어떻게 사냐?"


14년 동안 매번 들어온 말이다. 그래 난 왜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를 기다리게 하며 이렇게까지 일을 많이 할까.

"음... 그건, 내가 증명할 게 이것 뿐이라서 그래"


주방을 보며 나란히 앉는 테이블이었는데, 내 말이 끝나자 친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너도 알다시피, 난 한 회사에 오래 다니지 않잖아. 이 회사도 이직한지 이제 고작 10개월이거든. 내가 이직을 많이 해봐서 아는데, 첫 7-8개월이 중요해. 그 때 내 입지가 결정이 나거든. 더 다니든 말던, 일단 인정을 받아야하는건데 입사한 지 얼마 안된 경력직이 인정받을 건 일에 대한 성과 밖에 없어. 1년이라도 제대로 일하는 모습을 보인 뒤에, 더 다닐거면 정치도 병행하는거고, 그것도 싫다하면 더 성과로 승부를 거는거고..."


친구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넌 14년간 회사에 보인 충성심이 있잖아. 어떤 힘든 상황이 주어져도 도망가지 않고 버틴다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네 편도 많이 만들었을거고. 나는 그런 지지기반이 없어. 그러니 대신 일로 승부를 거는거지. 그래서 매번 허덕이고, 매번 야근을 하느거고"


지난 14년간 퇴사를 했지만, 아마 '퇴사하고 싶다'는 마음만 세면 1000번은 될 것이다. 그 때마다는 아니어도 진심으로 불안할 때마다 나는 이 친구를 찾았다. 쌍욕과 knee kick이 오가는 살벌한 건설회사에서 14년을 보낸 친구의 노하우를 전수 받기 위함이었다. 그 때마다 물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회사는 다니냐...?" 라고.


매번 친구는 다른 대답을 했지만, 이번에는 의외의 답을 했다.

"사람들이 좋아. 관계도 좋고..."


그 친구는 일도 잘했다. 전기과 출신인 그 친구는 회사에서 어렵고 까다로운 현장마다 투입되어 성공적으로 업무를 마쳤다. 친구 역시 일을 즐겼고, 성과와 인정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 외로 진급이 몇 번 밀리면서 회사에 대한 태도가 약간 달라진 듯 했다. 현장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현장 소장님들, 회사 상사들과의 술자리 얘기와 여럿 에피소드들이 중심이었다. 친구는 뭔가 내려 놓은 듯 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소용이 없더라. 더 힘들고 복잡한 현장에 투입될 뿐이야. 난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어느날 보니 본사에서는 나를 '소방수'처럼 보고 있더라고. 본사로 올라가야 임원이 되는 건데, 계속 이런 이미지로 남으면 불러들일 일이 없지"


언제나 느끼지만 회사는 일을 잘하는 사람을 승진시키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사람을 승진시킨다. 그걸 깨달은 친구는 일에 대한 의미를 조금 내려놓은 듯 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상황을 최대한 즐기는 데 집중하는 것 같았다. 야근과 주말근무를 줄이고, 가족들과 캠핑을 다니고, 함께 오래 일한 현장과 사무소 사람들과 관계를 잘 다지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친구 마음 속에서 이 회사는 직업에서 직장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다가, 이제는 몸담고 있는 장소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대소사를 챙기는 것도 일종의 '근무'에 포함되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직장이라는 곳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고, 그건 나에게 전혀 결격사유가 되지 않았다. 회사는 나를 완벽히 이용하는데, 내가 회사에 인간적으로 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어느 정도 다니다가 내 업무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 내세울만한 게 안되는 너무 작고 쉬운 프로젝트만 하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데이터를 고친다거나 등의) 문화가 팽배한-이 들면 바로 옮겼다. 내 업무 스타일이 잘못 고정되는 것도 싫었고, learning point가 없는 프로젝트하느라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옮긴 결과, (한국에서 말하는) 회사에 대한 신의와 충성도가 있다는 이미지는 잃었지만, 대신 업계의 상황과 다양한 조직형태에서 나올 수 있는 이해관계는 체득했다. 동시에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 방향이 나에게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과 식견을 쌓을 기회가 많아졌다.

의도하지 않게 지금 있는 곳에서 1년을 채웠고,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한 junior들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나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잡다한 HR 문제와 정치라인에 대한 문제들 역시 등장하고 있다. 얼마 전 팀 year - end party가 있었는데, 뒷날 들어보니 8시에 '내일 보고서가 있어서요'라며 쌩하고 나온 나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PM들이 새벽 2시까지 팀장과 함께 가라오케에서 열심히 놀다(?)가 들어갔다고 했다. 그 중에는 정말 팀장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팀장의 회식 취향은 정말 나를 포함한 junior들과 달라서 안 간게 다행이다 싶었는데,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정도의 사회생활한다고 성과가 무너지는 건 아니지 않나?? 별 생각이 드는 와중에, 중요한 건 친구처럼 직장에 안착하냐, 퇴사를 반복하며 업무에 몰두하냐가 아니라, 이 모든 게 내 의지의 선택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사 눈치를 보며 싫은 자리에 2시까지 있다보면 나는 은연 중에 업무의 소홀함을 뭉개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혹은 일만 주구장창하다보면 junior들이 회사 소식에 둔감한 나를 무시할 수도 있다. 어떤 길이든 부작용은 따르게 마련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나는 직업인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고, 그게 어느 회사이든, 혹은 프리랜서이든 상관없이 내가 온전히 바로 설 수 있을 능력을 갖추는 게 중요했다.


친구의 노선 변경이 아쉬웠지만, '가족을 위해 가늘고 길게 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쿨하게 인정하는 그 모습이 또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그 모습에 기분이 취해서 내가 얻어 먹을 차례인데, 그 비싼 양갈비를 계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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