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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Nov 02. 2020

비참한 국제 미아

동남대학은 중국어로 뭘까요오


호랑이에게 물려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호주에서 한밤중에 길을 잃은 이후로 전혀 생각도 않고 있다가 오늘 하필 또 생각난 야속한 그 속담.


그래, 야밤에 아무것도 안 보이던 호주에서 길 잃은 것보다는, 대낮인 지금 상황이 훨씬 낫잖아?


손가락을 옥죄는 짐 비닐봉지 대여섯 개를 우루루 길바닥에 풀고 길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이름.. 아파트 이름.. 분명히 아파트 이름은 4개의 한자였다.


그런데 전혀 모양도 음도 기억이 안 날뿐더러 4개짜리 한자를 쓰는 아파트 이름이 한두 개일까??


일단 아파트 한자 4글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 같았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머리를 달달 굴려 짜내 보니 다행히도 이런 저런 정보가 착즙 되기 시작했다.


집 뒤에는 커다란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그 정류장은 종점인 모양인지 바로 뒤에 버스 차고지도 있었고, 항상 텅 빈 버스가 와서 우리 집 뒤에서 버스 타는 사람들은 다 앉아갈 수 있었다. 테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집 근처가 버스정류장 종점이라 항상 버스 타면 앉아갈 수 있어서 좋다고.


그럼 몇 번 노선의 종점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으니 몇 번 노선의 종점 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3 자릿수 숫자의 버스가 왔다갔다한 기억밖엔...


그럼 버스정류장 종점도 단서에서 탈락.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일 큰 단서가 생각이 났다.


집 앞에 남편이 출근하는 Monash University!! 모나쉬 대학이 있는데!!

그런데 그 모나쉬 대학이 중국어로는 조금 다른 이름이었다. 중국은 콜라도 클러, 환타도 쁘은따, 오스트레일리아도 오따리아 ... 이런 식으로 한자로 차용하는 과정에서 음이 많이 바뀌기 때문에 영어 원음을 아는 건 소용이 없다.


게다가 이 모나쉬대학은 학부과정이 있는 우리가 아는 큰 캠퍼스가 아니고, 몇몇 학과의 대학원 과정만 운영하는 호주의 분교 정도라서 그냥 딸랑 건물 하나가 끝이었기 때문에, 모나쉬 대학교로 가 달라고 한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 모나쉬 대학교, 4글자 아파트...


아무리 도움 안 될 것 같은 정보라도 많이 모이면 결국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머리를 더 짜내 보기 시작했다.


집 앞에서 본 것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빨간색 한자가 궁서체로 무섭게 쓰여 있던 병원이 있었고... 그 병원의 이름은... 당연히 모르겠다. 한자니까.

그 병원 옆에는 뭐가 있더라..? 이렇게 하나하나 집 근처에서 본 것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이건 거의 뭐 셀프 최면 치료 수준이었다.


헛!!!! 그때 갑자기 무언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내가 쑤저우에 도착하던 날, 우리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근처에서 보았던 빨간 한자 간판이 기억났다.

유일하게 내가 4글자 다 읽을 수 있었던 빨간 한자 간판...


그 간판은 바로,


<동남대학 東南大學> 간판이었다.


실제로 내가 본 그 간판 ㅎㅎ 중국판 로드뷰로 찾음



아무리 내가 한자 바보라도 동쪽 동, 남쪽 남, 그리고 대학은 한자로 읽을 수 있었기에 그 4글자가 온전히 눈에 들어와서 오! 동남대학이구나! 했던 기억이 났다.


이건 아주 큰 단서였다.


그 생각이 나자 테리가 호주에서 했던 말이 또 하나 생각이 났다.


<모나쉬 대학교는 쑤저우에서 동남대학이랑 대학원 과정을 같이 운영하고 있어서 동남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많이 온다. 그리고 동남대학은 상위권 학생들이 가는 곳이라 똑똑한 학생들이 아주 많다>


그때 모나쉬대학이 중국어로 뭔지 물어보면서 동남대학 (영어로는 south-east university 였음) 은 중국어로 뭐냐고 물어봤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한국어랑 상당히 비슷한 발음이어서, 우와 테리야, 그거 한국어로도 동남대학이야! 하고 같이 웃었던 기억이 전구에 불이 탁 들어오듯이 켜졌다.


그 동남대학만 갈 수 있으면, 아파트는 걸어갈 수도 있을 법한 거리였다.


좋아, 나 이제 집에 간다.


마트 앞에 잔뜩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어마어마한 짐을 끌고 힘겹게 올랐다.


첫 번째 시도


나: 니하오!!!

기사: 취날리?? (어디가?)

나: (심기일전하고) 동,남,대,학.

기사: 쎤머??? (뭐라고???)

나: (심호흡하며 한 글자 또박또박) 동, 남, 대, 학

기사: 그런데 몰라 내려!!



두 번째 시도


나: 니하오!!!

기사: 어디가삼?

나: 똥,놤,대,학...?

기사: 뭐라는겨

나: 동, 남, 대. 학!!!? 똥 ↑ 남↓대↑학 ↓???  

기사: 뭐라는거여 내려 안가



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시 짐을 내리고 퍼질러 앉아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테리가 그때 동남대학을 중국어로 얘기했을 때 동남은 거의 완전 비슷했고 대학이 조금 달랐는데...

그 대학을 중국어로 생각해 내야만 했다.


대.. 대는 <클 대, 大> 이거겠지. 중국어로 대가 뭐여??

갑자기 어릴 때 즐겨 봤던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이 생각났다. 거기서 항상 대인을 따거! 라고 했었는데...

그럼 대학의 대는 중국어 발음은 따? 인가.... 오.. 굉장히 그럴듯한 추리다. 따, 맞는 것 같다.


학은 뭐여.... <배울 학 學> 학인데.. 이 학은 중국어로 뭐냔 말이여 ㅜㅜㅜㅜ

학.. 학... 아무리 황제의 딸을 생각해 봐도 '학'자를 본 기억도 들은 적도 없다.


그 황제의 딸 드라마에서 향비마마가 나비로 변해 날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나비는 중국어로 후디에~~라는 건 기억나는데.. 지금 와서 나비를 중국어로 알면 뭐한담...


학.. 학.. 학.. 학생... 학교...학자.. 별 생각을 다 하는데 갑자기 학생이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갔다.

중국 오기 전에 중국어 공부를 해야 하나? 싶어서 중국어 책 한두 페이지를 펴 보다 에이 몰라 하곤 머리가 아파 관둔 적이 있는데, 거기 제일 처음 나온 문장이 <저는 학생입니다> 였다. 유일하게 배운 2-3문장 중 하나였다.


오!!! 중국어 발음마저 기억 났다!!

저는 학생입니다 =워 쓰 쉐셩

그럼 학은 쉐..인가보다!!!!!!


좋았어 , 그럼 동남대학은 동남따쉐... 중국어로 이런 발음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시 택시를 탔다.


세 번째 시도


나: 니하오!!!

기사: 어디가

나: 동,남,따,쉐

기사: 어디라고???

나: 동 ↑남↓따↑쉐??

기사: 뭐여 내려


울고 싶었지만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바로 뒤 택시에 올랐다.

일단 이대로는 다 실패했으니 이번엔 나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요청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번째 시도


나: 니하오

기사: 어디가

나: 한궈런 한궈런

기사: 오 한국인이여?? (거울로 내 모습을 확인하고 신기해하는 눈치)

나: 뙈 (응) 쒜쒜 (고마워)

기사: 어디가셔?

나: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똥,남,따,쉐

기사: 뭐라고?

나: (성조를 이리저리 바꿔봄) 또옹,남,따아,쉐? 똥난따쉐? 동난따아쉐에? 똥!남!따!쉐!!!!

기사: (유심히 내가 한 말을 되뇌임 - 뭔가 이해해주려고 애쓰시는 눈치) 똥.난..따.. 쉐..

또옹..나안..따아..쉐이... 똥난따쉐.... 아!!!!!! 똥난따쉐?????? 똥난따쉐  나거 짜이 쑤저우위엔취마???


와, 이거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기사님 입에서 똥난따쉐! 하는 말이 나오고 뭐시라뭐시라 중국어로 밝은 표정 + 확신에 찬 어투로 물어보는 걸로 봐서는 기사님 머릿속에 있던 뭐가 하나 얻어 걸린 듯 했다.


나: 뙈돼뙈또ㅒ또ㅒ또ㅒ!!!!!!! (네네네네네네네!!!!!!!)


무조건 콜이었다. 어딜 가든 잘못 가든 뭐 어때. 이 마트앞에 계속 있어봤자 뭔 소용이람. 일단 가보는거지 뭐.




그렇게 택시가 출발했는데, 출발 후 10여분 뒤 창밖을 보니 아까 건너왔던 그 호수를 다시 기사님이 건너가고 있었다. 나.. 왠지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손톱을 뜯으며 창밖을 보는데, ... 내 눈앞에.... 눈물나게 반가운 그 간판... 똥난따쉐 간판이 펼쳐졌다....


다시 만난 그.간판.... 소리 질러~~~~~~~~~




기사님은 똥난따쉐에 다 왔다고 나를 내려줬고, 나는 진짜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꾸욱 참고 그 엄청난 짐들을 들고 집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사실 집까지도 은근 거리가 꽤 되어서 (800미터는 넘을듯...) 많은 짐을 들고 걸어가는게 너무 힘들었지만 기사님한테 중국어로 저기까지 좌회전, 우회전 하면서 가 달란 말을 못해 그저 내려서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진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꾸욱 참고 사온 것들을 정리하는데,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집에 왔다는 안도의 마음, 내가 오늘 겪은 고생에 대한 충격, 말 안통하는 나라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걱정, 원치 않는 나라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서러움... 정말 여러가지가 섞인 슬픈 울음이었다.


사온 걸 여기저기 흩뜨리며 엉엉 울다가 겨우 진정하고 정리를 마치니 남편이 퇴근해서 신나는 얼굴로 집에 왔다.


내가 오늘 겪은 어마어마한일을 과장도 좀 보태 서러워서 이야기를 하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남편은 집을 잘 찾아왔다며 다행이라며 박수를 친다.


그 모습이 새삼스레 얄미웠다.


아직도.... 솔직히... 얄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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