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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Dec 11. 2022

미셸 푸코, <말과 사물> - 인식의 선험적 조건

에피스테메(episteme)

... 인간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말로 생각을 표현하면서, 언어적 형태의 역사적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사유를 언어적 형태로 둘러싸면서 자신의 뜻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말의 요구를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언어의 문법적 경향은 그 언어에서 표명될 수 있는 것은 선험적 여건이다. ... - 미셸 푸코, 이규현 역, <말과 사물>, 민음사, p412 -


  니체는 ‘번개가 친다’의 문장을 예로 들어, 인류의 언어습관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지적한다. ‘친다’의 주어는 번개가 아니라는 것. 왜? 치는 것 자체가 번개이며, ‘친다’는 이미 번개를 매개하고 있는 동사형일 뿐이다. 차라리 주어가 제우스이면 몰라도 번개가 스스로를 치게 할 수 있는 주어가 아니라는 것. 


  다른 예를 들자면, ‘바람이 분다’에서 ‘부는’의 주체가 바람일 수가 없다는 이야기. 바람이 저 자신을 스스로 불게 할 수 없고, 부는 것 자체가 바람이며, 바람이 안고 있는 성질이 ‘부는’일 뿐이다. 동사 앞에 주어가 오는 문법적 구조로 인해, 인간은 동사 앞에는 항상 그 동사를 행하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야. 


  ‘자유의지’에 관한 스피노자의 유명한 비유, 날아가는 돌이 스스로의 의지로 날아간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겠느냐 말이다. 다시 풀어 말하자면, 우리는 개인의 의지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저에는 이미 선험적 조건의 영향이 있다는 거야. 라캉의 정신분석과도 맥이 닿는 이야기인 거지.


  푸코가 말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란 시대마다 어떤 사조와 경향을 형성하는 사회적 무의식, 즉 인식의 조건이 선행한다. 쉬운 예로 들어, 문단의 담론을 욕망하는 이들은 그 문단의 조건 안에서 인식하기 마련, 글은 문단에 가까워야 세련된 것이라고 느끼는 고정관념이 있는 거다. 푸코의 ‘권력적 지식’과도 이어지는 내용인 거지. 권력은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동조로 작동하는 것.


  물론 푸코는 비판적 스탠스만 취하는 건 아니다. 후설이 현대철학에 흩뿌린 키워드인 ‘의미’의 작용, 그 전제 안에서 인식이란 것도 가능한 거니까. 우리가 세계를 바라볼 때, 나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정렬과 조합으로 인식한다는, 이게 현상학의 전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저런 담론 사이에서 기득과 소외가 발생한다는 거지. 어느 저자 분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서점가에서 신인 작가의 책이 눈에 잘 안 띄는 이유는, 같은 주제의 기득권들이 점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독자들의 구매 조건 또한 선행하는 담론이 미치는 영향 안에서일 때가 있잖아. 또한 신인 작가 자신도 그들의 글을 읽고 성장한 거긴 하니까. 스스로 넘어서야 하는 딜레마이기도... 그 시절을 살아가던 누군가에겐, '모닝빵처럼' 팔려나간 이 책의 저자 푸코가 그 대상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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