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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넷 Nov 06. 2019

선택 장애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눈보라가 몰아치던 1992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산부인과에서 3.8킬로그램의 머리 큰 아이로 태어났다.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내 머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기계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계가 투입되기 전까지 홀로 사경을 헤매며 고군분투했을 엄마를 생각하면 복부 한편이 시큰해진다. 하지만 엄마는 성장과정에서 비중격 만곡증으로 코가 휘어버린 나를 보며 그때 기계를 사용한 탓이라며 이따금씩 콧잔등을 붉히곤 한다. 어찌 됐건 서로에게 미안함을 안겨다 준 출생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아빠는 내가 태어나던 날 눈보라를 헤치며 집에서부터 병원까지 따뜻한 물을 끓여다 나르고, 병실 온도를 직접 체크하는 등, 누나들이 태어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행동들을 보였다. 특히나 입과 귀의 간격을 좁힌 채 끊임없이 이불을 들추며 나의 성별을 확인했다는 것이 엄마의 증언이다. 딸 둘을 가진 30대 남성에게 아들의 탄생은 이다지도 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엄마는 누나 둘을 출산한 후 더 이상의 자녀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권하여 타이른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외할머니다. 외할머니는 남의 집에 들어가서 아들 하나 놓지 않는 것은 그 집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며, 딸의 안위보다 사돈지간의 도리를 더욱 걱정했다. 그렇게 나는 두 집안 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한 30대 남성의 꿈을 완성시키기 위해 추운 겨울 차가운 기계의 힘을 빌려 이 땅에 태어났다.

내 기억의 시작점부터 엄마 아빠는 각방을 썼다. 따라서 나는 세상의 모든 부모는 각방을 쓰는 줄 알며 자랐다. 마찬가지로 내 기억의 시작점부터 엄마 아빠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러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 시절 내가 접한 교재에서는 인자한 아버지와 가정적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정상 자녀가 있는 집안 만을 정상 가족으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나이임에도 우리 집안의 결핍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나는 항상 사상 전향을 강요받는 전쟁 포로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나 전향에 대한 강요는 야밤에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항상 이랬다. “오늘은 누구랑 잘래?” 어렸던 나는 매일 저녁식사가 끝나고 세수를 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오늘은 누구를 택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그 선택은 적당한 분배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선택받지 못한 자에 대한 미안함이 늘 존재했다. 따라서 어린 나는 아빠와의 잠자리를 택한 어느 날, 새벽이 되도록 잠들지 못하고 아빠가 잠들기만을 기다린 후 잠든 엄마 방을 찾아가 상처를 위로해 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나의 선택에는 늘 누군가의 상처가 고려되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누군가의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포기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터득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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