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신의 프로토콜 1.1
인간성을 담보로 기술을 산 어른들은 가장 인간적인 시대로 쫓겨났고,
괴물로 자라난 기술은 남겨진 아이들에게 원죄를 물었다.
구속된 환경에서 길러진 아이들에게 자유는 여전히 그 이름으로 불렸으며,
아이들은 욕망이 주입된 로봇의 삶을 살고 있었다.
ER(Ecological Restoration) 10년,
잠에서 깬 아이가 오른손으로 벽을 더듬는다.
벽에 달린 버튼 하나를 누르니, 침대 머리 부분이 전동음을 내며 천천히 올라온다.
맞은편 벽에 걸린 모니터와 시선이 일치하는 순간 손을 뗀다.
검은 면티, 검은 사각팬티를 입은 이 백인 남자아이는 823이다.
누운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굴리며 짧은 영상을 반복하거나, 무뚝뚝하게 '다음'을 외쳐 알고리즘이 고르는 영상을 차례로 시청한다.
아이의 반대편에서 방문이 열리고, 예쁜 얼굴과 곡선을 가진 여성형 휴머노이드가 등장한다.
로봇이 미소 띤 표정과 밝은 목소리로, 식판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인사한다.
"좋은 아침이야, 823! 식사 가져왔어."
823이 대답 없이 테이블로 이동한다.
음식을 본 그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불안한 눈빛이던 로봇은 태블릿과 식판을 아이에 가깝게 조심스레 밀어준다.
아이는 태블릿을 향해 다시 한번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한다.
"16, 72, 364 채널 최근 영상"
눈을 가린 검은색 필름이 부착된 헬멧을 쓴 364가 화면에 등장한다.
외형만으로는 남녀 구분이 불가능한 검은색 옷차림에, 유독 두 귀만 드러난 헬멧은 상의와 하나로 이어져 있다.
가슴의 은색 배지가 인상적이다.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364가 이제 막 방송을 시작했다.
"오늘은 특별히 주문한 음식을 먹어보려고 합니다. ER 이전, 그러니까 환경이 파괴되기 전의 사람들은 이런 걸 마음껏 먹었다고 하죠? 바로 스테이크입니다. 치킨, 소 안심, 등심 스테이크 이 세 가지를 준비했어요."
364가 헬멧에 연결된 마스크를 내리고 먹기 시작한다.
그제야 823의 표정이 풀리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숟가락을 든다.
방송이 끝난 후, 한숨과 함께 내려다본 식판에는 콩으로 빚은 고기 모양 요리가 반 이상 남아 있다.
"스테이크 먹어야겠어. 포인트 얼마나 필요해?"
로봇이 아이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한다.
"현재 842포인트 남았고, 가장 저렴한 치킨 스테이크는 2158포인트, 안심스테이크는 5158 포인트 더 모아야 해. 저번 주에 피자, 파스타 사 먹느라 포인트 많이 썼어."
한 명의 아이, 한 기의 파트너 로봇이 함께 지내는 공간을 byte라 하며, 아이 이름이 곧 byte의 이름이다.
방음 시설이 완벽히 갖춰진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 크기의 공간에는 침대, 테이블, 투명한 유리로 된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다.
파트너 로봇이 깔끔하게 정리한 진열장과 물기 없는 세면대도 보인다.
다만, 거울은 없다.
Giga 세계에는 거울이 없다.
byte 823과 동일한 구조의 byte 341에는 823과 같은 옷, 같은 머리스타일을 한 341이 살고 있다.
흑인 여자 아이 341 역시 의자에 앉아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고 있다.
그녀의 파트너 로봇은 잘생기고 단단한 체형의 남성형 휴머노이드다.
로봇은 태블릿 영상에 빠져든 아이에게 방해될세라 조심스레 식판을 당겨 치우고 있다.
영상 속 진행자 역시 앞서 823이 본 인물과 동일한 형식의 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옷 가운데를 지나는 띠의 디자인은 다르다.
상의는 목에서 끝단까지 앞뒤로 2cm 폭의 직선, 하의는 골반에서 좌우 무릎까지 내려오는 같은 폭의 직선, 총 4개의 띠가 있다.
양말에는 바깥면에 하나씩, 신발에도 각 하나씩 있다.
아이들과 로봇들은 그 띠를 모두 줄무늬라 부른다.
대개의 아이들은 흰색 줄무늬 옷을 입지만, 외모에 관심 있는 아이들은 녹색 혹은 더 비싼 여러 색을 선호한다.
방송 진행자는 각각의 줄무늬가 다채롭다.
빛나는 금색 배지는 특히 눈에 띈다.
"저도 시작은 똑같았어요. 당연히 검은 옷에 흰색 줄무늬였겠죠. 다음은 검은색에 녹색. 그리고 여러 색을 거쳐 오늘 드디어...... 이 옷을 입게 됐습니다. 여러분, 이 색깔을 보세요. 괜히 명품이 아닌 것 같아요. 저까지 명품이 된 기분인데요?"
341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로봇에게 묻는다.
"Encourager가 되기 전에는 도저히 살 수 없겠지?"
"지금까지 포인트 누적 추세로 볼 때, 다른 소비를 반이하로 줄이면 10개월 안에 가능해."
"반이나 줄여야 해?"
"Encourager가 되면 원하는 옷 마음껏 살 수 있잖아? 너도 할 수 있어. 포기하지 마."
조금은 밝아진 341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byte를 나서기 위해 옷을 입고 있는 두 아이.
친절하게 그들을 돕는 두 로봇.
823은 검은 속옷, 흰색 줄무늬 검은 양말, 흰색 줄무늬 검은 운동화, 흰색 줄무늬 검은색 옷을 입고 있고,
341은 검은 속옷, 녹색 줄무늬 검은 양말, 녹색 줄무늬 검은 운동화, 녹색 줄무늬 검은색 옷을 입다.
두 아이가 문 앞에 섰다.
매너(manner) 점검을 통과해야 한다.
지정된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문에 달린 센서 앞에 서면, 파트너 로봇이 점검을 요청하고, 승인을 알리는 파란 불이 켜져야 byte 문이 열린다.
Kilo라 불리는 건물에는 동일한 byte 1,000개, 1,000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다.
외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갈 수도 없다.
이러한 Kilo 1,000개가 모이면 Mega가 되고, 1,000개의 Mega가 모여 전체 세계, Giga를 이룬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파트너 로봇과 함께 복도를 줄지어 걷는 아이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이름표도,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상징도 없다.
341을 포함한 일부 아이들만이 다른 줄무늬 옷을 입고 있지만, 형태는 모든 옷이 완전히 같다.
줄무늬 색으로 구분이 가능할 듯하지만, 아이들이 매일 같은 옷을 입는 게 아니라 구별은 늘 애매하다.
반면, 파트너 로봇들은 저마다 다른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갖추고 있다.
색상과 재질, 디테일까지 각 로봇의 체형에 맞춰 조화롭게 구성된 모습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Education Centre라 적힌 LED 전광판 아래, 아이들이 줄지어 입장하고 있다.
좌석은 지정되지 않았고, 들어온 순서대로 앉는다.
이곳에서 매일 정규 교육이 이뤄지며, ER시대 이전의 역사, Giga 세계·규범·언어·환경 등을 학습한다.
대형 영화관과 같은 실내에는, 반쯤 누운 자세로 편안하게 시청할 수 있는 좌석과 그들의 평균 시선이 향하는 위치를 고려한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대형 스크린에 교과 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시선이 화면을 향하는지 복면에 달린 필름의 센서로 체크하며, 그 시간을 합산해 포인트로 환산한다.
아이들이 포인트를 누적하는 첫 번째 방식이다.
10초에서 30초 분량의 각 영상은 두 번씩, 때로는 세 번씩 반복된다.
전체의 흐름을 통해 전반적인 내용과 맥락을 가르치던 ER 이전 시대 교육과 달리,
단문의 문장으로 핵심만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영상을 설명하는 음성과 자막이, 영락없는 ER 이전 시대의 쇼츠 형식이다.
"ER 이전, 무분별한 개발로 환경이 심하게 파괴됐습니다. 인간이 살기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Daris , Zarek, San 이 세 영웅이 GIGA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환경 회복 프로그램이 지구를 살리고 있습니다. 아직 대기가 심하게 오염돼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Giga는 안전합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돼 있으니까요."
"바이오 시티입니다. 환경이 오염되기 전 자연을 테마별로 재현한 공간입니다. 포인트를 모으세요. 그곳에서 자연을 만끽하세요."
수업이 끝났다.
절전 모드 상태로 벽을 둘러 대기하던 파트너 로봇들이 활성화돼 아이들에게 태블릿을 전달한다.
수업 내용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다.
며칠 간격으로 같은 내용이 반복돼, 아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문제를 풀어낸다.
포인트를 쌓을 수 있는 두 번째 방식이며, 지식 평준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게 두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 모두 파트너 로봇이 건넨 에너지 음료를 마신다.
과거, 커피로 불린 이 검은 음료는 설탕이 섞여 달다.
카페인과 당의 조합은 다음 일과에 효율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줄지어 이동하던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넓은 피트니스 클럽을 연상시킨다.
이곳의 이름은 Volt Gym이다.
168개의 byte로 구성된 각 층에 하나씩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Volt Gym 입구에는 체형, 근육량, 체지방 등을 측정하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168개의 운동 기구가 반듯하게 정렬돼 있다.
아이들은 들어온 순서대로 기구 앞에 선다.
모든 운동 기구는 전동이 아닌 기계식으로, 힘을 가한 만큼 작동한다.
러닝 머신에 올라탄 아이가 바닥을 힘껏 구르며 달리기를 시작하고,
사이클 머신에 올라탄 아이는 페달을 밟는다.
벤치 프레스에 누운 아이는 덤벨이 없는 봉을 들어 올리고,
렛풀다운 기구에 앉은 아이는 손잡이를 힘껏 당긴다.
총 6가지 기구가 있으며 매 15분마다 다음 기구로 옮긴다.
각 기구에는 눈이 향하는 위치에 개인 태블릿을 연결·고정시킬 수 있는 장치가 있고, 그 장치 위쪽 한가운데에 운동량에 따른 숫자가 표시된다.
포인트를 쌓는 세 번째 방식이다.
아이들이 작동시키는 기구는 자가발전 장치이며, 운동을 통해 생산된 전력량은 그대로 포인트로 환산된다.
이때 포인트는 단순한 전력량뿐 아니라, 각 아이의 신체 조건에 따른 가중치를 적용해 환산된다.
Giga의 평준은 그렇게 유지된다.
ER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기계의 효율을 따져 그에 맞는 작업을 맡겼다.
그러나 Giga에서 인간은 각자의 고유 데이터와 능력을 바탕으로 한 효율의 몫을 따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