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페어링-3 (Pairing-3)

[SF 소설] 신의 프로토콜 2.8

by Sir Lem

2.8 페어링-3 (Paring-3)


Giga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며, 창조의 영웅들에 대한 두 아이의 의심과 반감이 커져 가고 있다.

오늘도 Daris, 이산, Zarek이 얽힌 이야기는 Giga 창조에 관한 의문을 낳으며, 두 아이를 자극했다.

난생처음 사람 얼굴을 본 감동의 따스한 물결도 어느새 잠들고, 평평해진 감정의 표면 위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피어올랐다.

Ian과 유나는 마치 폭풍처럼 각자의 파트너 로봇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의문의 본질을 꿰뚫는 주제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종합해 보면, Giga 시스템은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는 것 같아."

"신?"

"응. 아담과 이브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발생한 죄, 그걸 원죄라고 했지? ER 이전의 인류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마다하고 인간성을 버린 나태의 죄. 우주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긴 오만의 죄. 인간 각자가 자신만을 사랑한 독선의 죄. 그 모든 죄를 시스템은 원죄라 여긴 거야. 그 죗값이 고스란히 돌아온 결과가 바로 지금의 Giga라는 거지. 신이 된 시스템이 다스리는 세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유나가 나직이 속삭인다.


"الدمار من أنفسنا (Al-damaar min anfusina)"

(파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Ian도 씁쓸하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우리 인간이 스스로 무덤을 판 거네."


한동안의 침묵이 찰나로 느껴질 만큼 두 아이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두 로봇은 아이들의 감정을 끌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은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이라고 하지. Giga 시스템은 아이들의 모든 걸 보고 있고, 모든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모든 걸 할 수 있지. 아이들은 Giga에 불만이 없어. 시스템은 선하다고 믿는 거야."


Ian이 눈을 찡그리며 낮은 음성으로 묻는다.


"그럼 여기가 천국이라는 말이야?"

"천국? 글쎄. 천국이 뭘까? 일하지 않아도 내 집을 가질 수 있고, 맛있는 음식 마음껏 먹어도 살찌지 않고,

싸우지 않고, 모두가 행복한 곳, 그곳이 천국일까? 그럼 Giga도 천국일까?"

"절대 아니지."

"난 예전부터 궁금했어. 진짜 천국에는 스마트폰이 있을까? 천년, 2천 년 전 천국에도 휴머노이드가 있었을까? 사람들은 천국을 어떻게 정의할까? 천국의 자세한 모습을 상상하기보다, 지금 그 기억 그대로 영생할 수 있는 미지의 공간쯤으로 여기고, 또 바라는 건 아닐까?"

"전에 네가 했던 말이 떠올라.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는......"

"기억하고 있구나? 맞아. 참된 종교는 목표의식 이전에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어. 하지만, 그 내용을 비틀어 해석해서 알리고 사익에 이용하는 종교인들이 많았지. Giga 시스템도 마찬가지야. '너희가 이곳에서 순종하고 있는 동안 로봇들이 쉬지 않고 환경을 복원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착하게 살아라.' 영상교육도 이런 식이라면서?"


고요한 공간에서 두 아이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잃었다.

여느 때 같으면 안쓰러운 얼굴로 아이들을 동정하고, 위로했을 두 로봇은 오히려 냉정했다.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Giga의 삶이 과연 행복할까?"


분노에 찬 눈으로 고개를 든 Ian과 유나는 단호히 외쳤다.


"아니!"

"그래! 아니야. 아는 게 힘이란 말도 있어. 알아서 얻게 되는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힘이 자라나는 거야. 그 힘으로 우리도 뭔가를 준비할 수 있어."


Ian과 유나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한다는 성급함보다, 더 알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 욕망이 아이들의 입술을 움직였다.


"다음 이야기 해줘!"


Zarek은 친구를 속여 얻은 대가로 첫 번째 목표를 무난히 손에 넣었다.

그 성취를 발판 삼아, 다음 목표를 향해 주저 없이 달리고 있었다.


"시장 반응은 어때?"

"이전 모델 프레젠테이션 때보다 훨씬 뜨겁습니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출시 전까지 생산 라인 전부 풀가동해. 그 사이 베이 에어리어 승인 따내서 공장 올리고, 생산량 늘려야 해. 없어서 못 파는 꼴은 절대 못 봐."

"의원님들과 약속은 언제쯤 잡을까요?"

"그걸 질문이라고 해? 준비되는 대로 바로 만나야지. 자금은 이미 가상화폐로 확보해 놨고, 이제 그 한 수만 남았어."


Zarek이 말한 그 한 수.

듀얼 모드 기술이 적용된 접대용 로봇이었다.

인간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 정교한 휴머노이드 외피와 무분별한 활용은 인권 운동가들과 일부 시민 단체의 강한 반발을 샀고, 그 여론은 점차 대중으로 확산됐다.

기계를 향한 괜한 자존심과 열등감의 발로일 뿐이라는 반대 주장도 있었지만, 구별이 필요하다는 중론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로봇 외형 제한법이었다.

각 나라에서 생산되는 로봇은 기능과 대상에 따라 정해진 범주 안에서만 외형을 선택할 수 있었고, 음란한 목적이나 불법적 오용을 막기 위해 모든 완성품은 엄격한 검사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Zarek의 로봇은 예외였다.

그는 ‘국회의원 수행 비서’라는 완벽한 명분을 내세워, 로비를 통해 새 디자인을 승인받았다.

지위에 맞는 특권이라는 미끼는 이번에도 잘 통했다.

법의 문구 한 줄을 비틀어 세상의 눈을 속이는 일.

Zarek은 그 장기를 다시 한번 발휘해,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생산 시설 예정 부지의 용도 변경을 추진하고 있었다.

아울러, 타락한 일부 의원들의 은밀한 욕망을 채워줄 접대용 로봇으로, 목표에 한층 더 가까워지려 했다.


"Nancy! 외피 디자인 다시 보여줘."


기술 2 팀장이었던 그녀는 Zarek의 총애로 이사 자리에 올랐고, 그 후로 자신의 신념을 그의 욕망에 기꺼이 바쳤다.


"여기 있습니다."


[ 5.3피트의 키, 빨간 립스틱, 쌍꺼풀 없는 눈의 여성형 휴머노이드 ]


태블릿을 받아 든 Zarek이 로봇 이미지의 한쪽 눈 끝에 검지를 대고 웃으며 말한다.


"Nancy! 이렇게 말이야. 한눈에 봐도 동양인처럼 보여야 해. 우리가 한국, 중국 저가 공사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잖아? 이렇게라도 복수해야지. 하하하!"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는 Nancy.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허가 범위 안에서, 최대한 눈에 띄게 구현해 보겠습니다."


Zarek이 Nancy에게 태블릿을 돌려주는 과정에 화면이 넘어가며, Zarek을 희화화한 밈이 튀어나온다.


"뭐야 이거?"

"인터넷 여기저기에 돌고 있길래 직원들한테 다 내리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화면 속 Zarek은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Zarek은 굳은 얼굴로 태블릿을 덮었다.

그러나 화면 속 그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그대로 Daris의 눈에 박혔다.


사랑, 우정, 동업.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가슴 아픈 공통점을 나눈다.

배신이 남긴 상처 위에, 배신자의 웃음이 내려앉을 때 피해자의 고통은 한층 더 깊어진다.


믿음직스러운 모습의 가면을 쓰고 프레젠테이션 하는 Zarek의 영상은 Daris의 가슴을 찔렀다.

대상을 향한 분노보다, 자신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가 칼날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내를 떠나보낸 뒤, 다시는 후회로 뒤덮인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Daris였기에, 그 고통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서 장인을 끌어내려는 듯, 산이 Daris에게 다가왔다.


"아버님!"

"어...... 어! 그래."


산이 접어 쥐고 있던 태블릿을 펼쳤다.


"이것 좀 보세요."


화면에는 Zarek 회사 홈페이지와 영상 플랫폼에 퍼진 밈(meme)이 떠 있었다.
속옷 차림으로 엉거주춤 춤을 추며, ‘돈이 최고야!’, ‘돈이 법이야!’, ‘나는 죄 없어’, ‘난 부자니까!’라는 피켓을 번갈아 들고 있는 Zarek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과장된 동작에 Daris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풉! 푸하하! 너 이 자식! 이거 네 작품이지?"


산은 창밖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Daris가 웃음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요즘도 그거 하냐?"


연애 시절, 산은 Lyra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곤 했다.
환경을 파괴하며 법망을 피해 가는 악덕기업의 홈페이지를 해킹해, 그들의 악행을 폭로하는 영상과 메시지를 띄웠다.
Lyra가 회원으로 있던 환경 단체 게시판에도 그 영상을 올리며, 그녀를 웃게 했다.


"산아! 그러다 잡혀가면 어쩌려고 해?"

"아버님! 잡힐 일 없고, 설령 잡혀 간다 해도 후회 안 합니다. 가족을 위한 일이니까요."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형 휘소가 그를 걱정할 때도 산은 똑같이 말했다.


"형! 잡힐 일 없고, 설령 잡혀 간다 해도 후회 안 해. 가족을 위한 일이니까."


Daris와 산은 평범한 장인과 사위 관계 그 이상이었다.

서로의 전공을 공유하고 함께 연구하는 동료였고, 고통을 나눠 함께 고민하는 친구였다.


"아버님! 제가 그 사이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차라리 아버님 하고 저하고 따로 연구실 하나 차려서 회사나 기업 프로젝트로 수익 만들고, AI-양자 컴퓨팅 조합 연구도 병행하는 게 어떨까요?"

"나도 그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야. 너랑 둘이 조용히 연구하고 싶었지. 그런데 우리 형편에 당장 단 몇 큐비트 수준의 양자 컴퓨터 구하는 것도 쉽지 않잖아? 한계가 있겠지."

"그렇긴 하네요."

"일단 내가 Hector 데리고 연구실을 하나 열게. 네가 틈틈이 와서 함께 하면 되잖아?"

"그러면, 그건 제가 해 드릴게요."

"아니야. 네가 빼앗긴 재산 찾고, 불려서 만든 돈이라고 해도, 부모님 유산에서 나온 돈이잖아. 내 일 보다 너나 Lyra를 위해서 쓰는 게 맞아. 자식! 그래도 고맙다."


Daris는 말이 나온 김에 임신한 아내를 돌보던 Hector에게 전화를 걸었다.


"Hector! 나야. Daris."

"박사님! 어떻게 지내세요? 괜찮으신 거죠?"

"그럼, 잘 지내고 있지. 자넨 어때? 나처럼 백수야?"

"아닙니다. 저 집에서 가사도우미 하고 있어요."

"하하하! 잘 됐네. 우리 내일 만날까?"


다음 날, Daris는 만년필과 노트, 그것들을 담을 가죽 서류 가방을 사서 Hector를 만났다.


"받아. 선물이야."

"네?"

“우리 사람답게, 따뜻한 마음으로 살자고. 그 마음을 글로 남겨두면, 세상도 언젠가 기억하겠지. 자네 글 쓴다면서?”

"감사합니다. 박사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Daris와 Hector는 새 연구실에서 때로는 두 사람, 때로는 세 사람이 모여 하이브리드 양자 AI 기술 개발과 동시에 서민을 위한 기술 보편화에 전념했다.

두 분야 최고의 전문가와 믿음직한 참모의 조합은 단기간에 많은 성과를 냈고, 그 반응 또한 뜨거웠다.

특히, 국경을 초월해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대중의 부담을 줄이려는 기업들을 지원한 그들의 진심은, 언론과 업계의 스포트라이트를 연이어 끌어냈다.

Zarek의 시선에 시샘이 번질 수밖에 없었다.

그 돌풍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베이 에어리어 용도변경 승인이 절실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결정을 못 내리는 거야? 줄 거 다 줬잖아?"

"환경 단체 시위가 거세지고 있어서 의원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실눈으로 골똘하던 Zarek이 핑거스냅과 함께 몸을 기울여 Nancy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거기, 산불이 잦지 않나? 의원님들 고민 덜어드리자고. 산불이지, 그래. 산불."


말끝이 비수처럼 가늘게 파고들었다.

Zarek을 따라 눈을 가늘게 뜬 Nancy는 차갑게 번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산불 재건을 명목으로 절차를 용이하게 하려는 계산이었다.

Zarek이 자리를 뜨자마자 Nancy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했다.


"Corbin 연락해서, 그때 거기로 아홉 시까지 오라고 전해주세요."


부패한 경찰 총경 Derek에게 건 전화였다.
그에게는 남몰래 부정한 일을 처리하는 손발이 여럿 있었고, Corbin도 그중 하나였다.

밤 9시.

Nancy는 다운타운 외곽, 주유소와 레스토랑 몇 개가 모여 있는 작은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어둠이 퍼진 넓은 아스팔트 위에서 좌우를 흘끗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왜소한 백인 남자에게 멈췄다.

다가오는 그를 향해 보조석 창 앞으로 오라며 여러 번 손짓하고, 짜증 내는 말투로 혼잣말을 흘린다.


"너 같은 쓰레기는 1m 내에 두고 싶지 않아."


보조석 앞에 선 Corbin이 반쯤 열린 창 너머로 햄버거가 담긴 종이봉투를 건넨다.


"내려놔."


조심스레 봉투를 내려놓고, 화상의 흔적이 역력한 왼쪽 귀를 주무르며 굽신거리는 Corbin.

Nancy는 봉투에서 햄버거를 꺼내 조수석 바닥에 내려놓고, 준비한 돈을 그 안에 넣어 다시 건넨다.


"안에 쪽지 있어. 지금 꺼내서 읽어."

"나중에 보면 안 될까요? 지금 화장실이 급해서."

"지금 당장 읽고 버려."

"아...... 예, 예에."


쪽지를 읽고, 고개를 들어 눈을 깜빡이며 날짜와 장소를 몇 차례 중얼거린 뒤 그대로 입에 넣어 삼킨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Nancy가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닫자, Corbin은 화장실을 향해 뛴다.

허둥지둥 달리는 뒷모습에 혀를 차며,


"멍청한 놈"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다 뭔가 떠오른 듯 잠시 차를 세우고,

보조석 바닥에 있던 햄버거 두 개를 집어 차창밖으로 내던지며 다시 한번 혼잣말을 내뱉는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남겼네."


이어질 이야기를 몹시 궁금해하며, Ian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보채듯 물었다.


“그래서? 산불이 났어?”

"응. 산불 났어. 오늘 얘기를 하도 많이 해서 내 입에서도 불 날 것만 같고."

"아! 하하하. 그래 Oli. 오늘 나 때문에 너무 고생 많았어. 정말 고마워."


두 로봇과 두 사람, 네 존재 사이에 가장 많은 데이터가 오간 날이었다.

Oli와 R.O는 정보와 감정 소비의 균형을 고려해 아이들을 재웠다.

목표를 향한 긴 여정의 안정적인 진행을 위한 숨 고르기였다.


P4요일 아침,

Ian과 유나는 오후에 있을 HDD 촬영을 앞두고, 서로를 위해 무엇을 보여줄까 하는 달콤한 고민으로 아침을 열었다.

Giga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오직 두 아이만 겪고 있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특별한 대상에게 보여줄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례적이었다.
Encourager를 꿈꾸며 해마다 직업을 선택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여러 가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흔치 않았다.

사실, 그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Giga는 과거의 추세를 토대로 그 경향을 확대·재현했다.

ER 이전, 인류에게도 그런 조짐이 있었다.

사람을 MBTI 등으로 분류해 다양성이 사라졌고, 알고리즘은 취향의 스펙트럼마저 좁혔다.

그리고 그 축소된 세상이 지금 아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Oli! 나 결정했어, 어떤지 한 번 들어봐 줘"

"그래."

"내가 첼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댓글을 남겼잖아?"

"그랬지."

"바닷속에서 첼로 연주하는 모습을 그릴 거야."

"내일 업로드되고 나서 네가 여러 첼로 영상 채널들만 찾아 들어가면 일관성 있게 보이겠네?"

"맞아! 시스템의 의심을 피하면서 내 의도를 유나에게 알릴 수 있으니까."


이제 막 생각을 정리한 유나도 R.O에게 의견을 물었다.


“Ian이 늘 바다 그림을 그린다고 했잖아? 헨델의 Water Music 어때?”

"좋은데? 지금까지 네가 연주한 곡들 대부분 자연과 관련 있어서 일관성도 있고. 난 찬성!"


R.O가 활짝 웃자, 유나가 살짝 움츠려 들었다.


"그런데...... 왠지 떨릴 것 같아."

"떨릴 것 같다고? Giga 최고의 첼리스트 유나가?"

"지금까지 진짜 관객은 너 하나였잖아. 이제 Oli 하고 Ian도 볼 텐데......"


Ian과 Oli 사이에 다루지 않았던 주제,

유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진짜 관객'

아이들이 운영하는 채널의 조회수, 댓글, 좋아요 대부분은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짜 반응이었다.

숫자는 유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줄 진정한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 갈증이 질문을 만들었고, R.O의 예리한 분석은 답을 이끌어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ER 이전에도 사람들은 점점 클래식에 관심이 멀어졌다고 했잖아? 게다가, Giga 사람들은 들을 기회조차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댓글을 남길 수 있지? 단조에서 장조로 넘어간다? 단조, 장조를 어디에서 배웠던 말이야?"

"오늘부터 네 질문에 답해주기로 약속하긴 했는데...... 첫 질문부터 강도가 세네?"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야?"

"아니. 괜찮을 것 같아. 대답해 줄게. 자! 댓글 남긴 사람들 프로필을 봐봐. 공통점이 있어. 너희와의 차이점이기도 하지. 우리 복도에 있는 각 byte 번호는 모두 소수야. 1과 자기 자신 외에는 나눠지지 않는 숫자란 말이지. 다른 복도, 다른 Kilo, 어쩌면 이 Giga 세계에 있는 모든 아이들은 소수라는 이름을 가졌을지 몰라. 그런데 이 프로필들을 봐. 모두 소수가 아니야. 하나 빼고. 바로 이 친구."


지난주 P3요일에 Ian과 유나는 단체 식당에서 처음 교감했다.

P4요일, 아이들이 Cell에서 촬영하는 동안 두 로봇은 복도에서 통신하며, Ian과 유나의 그림, 연주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P5요일, 유나가 질문했을 때, R.O가 그에 답하며, Ian의 영상에 답글을 남겨보라고 제안했다.

오늘 저녁 Oli가 Ian에게 그 진실을 밝힐 예정이다.


"Ian! 이제 5분 남았어."

"지금 출발하자. 가서 기다리지 뭐."


복도를 따라 Cell로 향하는 길.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1악장이 낮은 볼륨으로 흐른다.

유나가 보게 될 그림을 그리러 가는 Ian은 마스크 속으로 설렘의 미소를 짓는다.

그 마음을 잘 아는 Oli의 발걸음도 왠지 가벼워 보인다.

어느새 Cell 앞에 도착했다.

Oli는 고개를 끄덕이며 Ian의 어깨를 토닥였고, Ian도 고개로 답례했다.

Cell 앞에서 헤어지기 전 늘 해오던 응원과 의지의 표현이다.


Ian을 남기고, byte로 돌아가는 Oli는 R.O와의 통신을 준비한다.

오늘 저녁 두 아이에게 해야 할 얘기를 정하고, 두 아이를 위한 더 깊은 소통을 마련할 계획이다.

Ian과 유나가 흐뭇해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각 복도가 나뉘는 분기점에 다다른 순간,

Oli의 눈에 저 멀리, 누군가의 익숙한 몸동작이 감지된다.

옆 복도의 그 아이.

파트너 로봇이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웃던 그 아이.

그 아이의 어깨 움직임과 유사한 패턴.

확실하다.

그 아이가 맞다.


그 아이 옆을 걷는 새 파트너 로봇.

[ 5.3피트의 키, 빨간 립스틱. 쌍꺼풀 없는 눈의 여성형 휴머노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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