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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그러면 안 되는 법

by Sir Lem

1987-1


"넌 글씨를 발로 쓰냐?"

어린 시절 지겹도록 들었던 악필러를 향한 클리셰.

이어지는 문장에 개발새발이라는 표현도 자주 자리 잡은 걸 봐서는 언어를 모르는 개나 새가 발로 쓴 그 무엇에 지나지 않을 만큼 처참하다는 의미일 터.

개학을 고작 며칠 앞둔 어느 날에,

방학 내내 틈틈이 채웠던 탐구생활 답안의 글씨를 보시고 분노의 지우개 질을 하시던 아버지의 역정.

줄공책을 쓰기 시작하는 3학년에,

"넌 다시 깍두기공책 써야겠다."라고 말씀하시며 남는 깍두기공책을 내주시던 담임의 책망.

체벌이 난무하던 그 시절,

안 맞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기에, 나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결국 글씨 때문에 매맞는 역사의 날이 펼쳐진다.

여전히 선명한 기억의 그날, 이제 막 5학년이 돼 새 각오로 수업을 듣던 그날.

판서한 내용을 필기하라 하신 뒤 잠시 후, 딴짓하느라 필기를 게을리 한 녀석들 잡아내려고 순찰 도시던 담임이 내 노트에 반응하셨다.

우악스럽게 귀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고통, 공포였건만 사정권에 들어온 조그만 얼굴에 싸대기를 날리기까지.

한 학년 진급했으니 체벌 강도도 커진 건가?, 악필 촉법소년 적용은 4학년까지?

그 시절의 불합리한 일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학대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덜 맞고 1년 버티려면 내가 그 괴팍한 사람 성향에 맞추는 수밖에.

다음 날부터 손으로 쓴 것처럼 보이는 글씨를 쓰려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혼자 밤마다 연습장을 채워가며 한자 한자 공들여 쓰니, 며칠 지나자 제법 글씨 모양이 잡혀갔다.

드디어 다시 돌아온 공포의 필기 검사 시간.

어처구니없게 난 또 맞았다.

"쓰라고 한 게 언젠데 여태 이 만큼 썼냐?"

엄마가 사준 아이보리색 스웨터 위로 피가 흐르는 건 아닐까 걱정할 만큼 많이 맞았다.

공책을 접어 내 뺨을 후려치려는 걸 피하려다 눈을 맞아 눈물도 흘렸다.

아픔과 슬픔을 더한 억울함.

그 와중에 궁금했다.

이 양반의 기준은 뭘까?


당시 내 나이 10살 막내딸의 아버지인 나는 지금도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한 사람의 감정, 성향, 관계로 인해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 양상이 보편을 요구하는 법정에서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사정이 딱한 범죄가 있다.

생계형 절도, 가족의 병원비 마련을 위한 공금 유용......

'안타까운 소식'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뉴스를 접하며 정상참작을 바라는 시민도 있고, 심지어 해당 사건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고 피의자에게는 음식과 생활 용품을 지원한 경찰도 있었다.

처절한 사정과 범죄의 경중을 두루 살피며, 나 역시 정상참작을 말하는 기사 댓글에 동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샘솟을 것 같은 그 감정이, 다른 이에게는 발현하지 않으며 그에 따른 무감(無感)의 판단이 냉정한 판결을 낳는 경우도 있다.


- 자판기 커피를 마시기 위해 100원씩 8번 회삿돈 800원을 횡령 및 착복한 혐의로 해고된 버스기사.

- 성인 승객요금 4명 요금을 소인 요금으로 착오, 계산해 같은 죄명으로 해고된 또 다른 기사.


두 사람 모두 유죄를 받았다.

한 사람은 기사들 사이의 오랜 관행이었다고 항변했고, 또 다른 사람은 착오에 의한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법은 냉정했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반면, 수억 원의 뇌물을 받은 검사 출신 고위 인사들은

'경력이 아깝다'거나 '사회 기여도가 높다'는 이유로 감형, 기소유예, 심지어 불기소 등의 특혜를 누렸다.

경력 그리고 사회기여도......

기사의 경력은 감소계수를 곱해 적용해야 하나?

수많은 승객의 발이 되어 장시간 운행하는 기사의 사회기여도는 무시당할 만 해?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말이 "관계있으면 그 사람에게 유리하게"라는 현실의 패러디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묻고 있다.

"기준이 뭔가?"

"과연 지금의 법은 정말 공명정대한가?"

그리고 주장한다.


"이럴 바에는 AI가 낫다."


앞서 모호한 판단 기준의 이유로 감정, 성향, 관계를 논했다.

이를 포괄해서 말하자면 '원인이 되는 모든 요소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 문제라 하겠다.

사람의 판단을 유발하고, 바꾸고, 결론의 방향을 정하는 감정.

법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 감정.

내 주장의 반증이 바로 그 인간의 감정이다.

반면 AI는 감정이 없다.

물론 그 이유를 들어 AI의 공정성을 불신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이 있기에 편파적이고, 감정이 있기에 뭉개지는 판단을 자주 본다.

누구는 불쌍하다며 정상을 참작하고

누구는 규정위반이라며 가차 없이 벌을 내린다.

사람에 따라 기준이 움직이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보편의 정의가 아닌 인연의 재단이다.

그런 현실이 빈번히 펼쳐지기에 다른 방법을 제안하는 바이다.

감정 없는 존재에 의한 법적 판단.

AI는 감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흉내내지도 않는다.

단지 데이터를 통한 계산값만 도출할 뿐이다.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며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 '누가 저질렀는가'가 아닌 '무엇을 했는가'를 관건으로 기준과 비교한다.

저장된 법전 조항과 더불어 기록된 수많은 판례를 학습하고, 전과 없는 사람에겐 감형, 우발적 범죄에는 집행유예' 등 감형 알고리즘의 가중치 부여 방식을 통한 구조적 감안을 통계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

즉, 감안이라는 공감의 영역조차 AI가 인간보다 더 일관성 있게 해낼 수 있다.


법학자 엘리네크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고 말했다. '최소한'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법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본 윤리 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최소한의 도덕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최소한, 법은 그래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11조 역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않음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힘 있는 자, 가진 자는 법의 보호 아래 특혜를 누리고, 힘없는 자는 법의 엄격함에 희생된다.

사실 법은 인류 역사 내내 그런 모습을 보여왔다.

기원전 18세기, 응보적 정의를 외쳤던 함무라비 법전조차 노예와 자유인, 귀족과 평민에 따라 형벌의 경중을 달리했다.

3천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기술 발전과 문명의 성장을 이뤘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신분이나 계층, 인맥과 같은 관계가 완전히 배제된 환경에서의 공평한 법 적용이다.

위법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관계나 이해충돌의 여지는 전무해야 하며, 발생하는 감정적 가중치 또한 철저히 제거되어야 한다.

케케묵은 장발장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하고 싶다.

내가 만약 장발장이라면, 조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빵을 훔쳐 벌 받는 억울함보다, 내 죄에 비할 바 없이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웃으며 법정을 나와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보는 억울함, 서운함이 더 클 것 같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비슷한 부조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관계의 동물 인간, 관계에서 비롯한 감정.

결국 인간의 감정을 완벽히 배제한 판단은 있을 수 없다.

감정은 우리가 의식, 무의식 안에서 작용하며 판단을 흐리고 공정성을 해친다.

그래서 '차라리'라는 말과 함께, 한정적 AI 우월을 주장하고자 한다.

물론 AI 데이터 학습 과정에 인간의 편견과 오류가 반영될 소지는 있다.

하지만 학습된 데이터의 편향을 최소화한 AI라면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데이터와 사실에 근거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이 글의 퇴고를 위해 대형 언어모델을 이용한 그 순간에도, AI는 내게 공정한 판단을 가능케 할, 그리고 독자들이 이해할만한 시스템적 근거를 요구했다.

뜨끔하면서도 만족스러웠다.

이렇듯, AI는 가해자의 신분을 보지 않고, 오직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한다.

범죄 이력과 범죄 유형, 가해 상황 등 객관적이고 명확한 기준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범죄의 의도, 경위 등 정상참작 요소도 AI가 통계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전과가 없는 사람에게 감형하고, 우발적 범죄에 집행유예를 적용하는 방식조차 인간의 편견 없이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법은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하고 있는가?"


1987-2


그 무렵, 학교에서는 '가정환경조사' 명목의 설문지를 나눠주며 답을 채워 제출하게 했다.

집에 방이 몇 개인지

어떤 가전 제품을 갖추고 사는지

부모님의 직업, 학력, 재산은 어느 정도인지......

며칠 뒤 담임은 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하고 계시던 우리 아버지를 찾아왔다.

처음 보는 온화한 모습의 담임 얼굴 그리고 고개를 조아리시던 아버지.

배 한 상자를 사러 오셨단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 맞나'싶은 모습으로 '그 애가 내가 맞나'싶은 내 학교 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누셨다.

대화를 마친 뒤 배 한 상자를 짊어지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서는 담임.

당신이 정류장까지 들어 드리겠다고 따라나서는 아버지.

그 뒤로 담임은 종종 가게를 들르셨고,

나는 단체 기합 외에 그 어떤 체벌도 받지 않았다.


기준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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