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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켄PD Jan 23. 2024

원조 캘리포니아 함흥냉면

캘리포니아 시골도시에서 만난 80년대 원조 한국의 맛

며칠을 한국 음식을 접하지 못했다. 미 서부 여행을 함께 로드트립하던 경석 씨는 결국 불만을 표출했다. 오늘만큼은 꼭 한국 음식을 먹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곳은 캘리포니아 중부의 작은 도시로, 한국 식당이 있을 리 만무하다. 농장 주인들인 백인과 농장에서 일하는 중남미에서 온 히스패닉들이 많은 도시이다.


너무나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글 지도에서 Korean Restaurant를 찾아봤다. 그런데 웬일인가? 한국 음식을 판다는 식당이 검색에 나왔다. 이런 시골 농장지대의 조그만 읍내 같은 도시에 한국 식당이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영업을 하는가 궁금하여 전화를 걸어봤다. 받자마자 한국어로 ‘여보세요?’라고 하니 상대측에서 당황해한다. 한국어는 못한다며 무슨 일인가 물어보고, 영업시간이 언제까지인가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또 하나 확인했다. 주인장이 한국인인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을 듣고 오늘 저녁은 그곳에서 먹기로 했다.


경석 씨에게 그 얘기를 전해 주니 안도의 한숨을 쉰다. 며칠간 햄버거, 양식 등만 먹고 그나마 가끔씩 보이는 중국집에서 면 요리나 볶음밥을 먹으면서 미 서부 일대를 로드 트립했었는데, 한국에서 온 경석 씨는 이제 4일째 한국 음식을 못 먹으면 다른 대도시로 일정을 바꾸자고까지 했다. 차에 싣고 다니던 라면과 김치도 이제는 동이 난 상황이었다.


저녁이 되어서 예약한 한국 식당으로 향했다. 나름 조그만 도시의 중간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외국인 직원들이 맞이해 준다. 식당 내부를 쭉 둘러본다. 역시 예상대로 한국인 손님은커녕 동양인도 없었다. 요즘 K-Pop, K-Drama에 이어 K-Food열풍까지 있다지만 이런 시골까지 한국 음식을 찾아 먹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듯하다.


경석 씨에게 미리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이런 동네에서 한국 음식은 미국인들 입맛에 맞춘 것이기 때문에 한국 본연의 맛은 기대도 말고 달거나 짜고 느끼할 수 있으니 그나마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 먹으라고 얘기했다.


메뉴를 받아 봤는데, 영어로 된 메뉴에 사진과 구성들은 생각 외로 다양한 한국 음식이 많이 있었다. 아무래도 불고기 같은 메뉴가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우리는 칼칼한 게 먹고 싶어서 매운 음식을 찾았다. 매운 음식을 찾다 보니 함흥냉면이 메뉴에 있었다. 사진으로 보니 다진 양념이 매콤해 보이는 게 그럴싸했다. 뜬금없이 함흥냉면에 꽂힌 경석 씨가 함흥냉면을 먹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보나 마나 뻔할 것 같다, 이런 시골에서 제대로 된 냉면이 나오기는 힘들 듯하고 어디 인스턴트 냉면이나 안 나오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함흥냉면도 시키게 됐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비주얼을 보고 너무나 그럴싸해서 놀랐고 다분히 한국적인 놋그릇까지 나와서 더더욱 놀랐다. 함흥냉면 첫 한 입을 먹어본 경석 씨가 놀란 눈동자로 외친다. “이건 한국에서 먹는 거보다 더 맛있는데요!" 한입 먹어보라는 제안에 설마 하면서 나도 한입을 덜어서 먹어봤다. 이게 미국 시골에 한인도 없는 동네에서 나올 수 있는 맛인가? 믿기 힘들었다.


일하는 직원에게 한국인 사장님을 만나 뵐 수 있는가 물어봤다. 재료를 사 오시고 좀 있다 식당으로 오신다고 한다. 그 사이 다른 주문한 음식도 먹어봤는데 다들 흠잡을 때 없는 너무나 전통적인 한국 음식이었다. 오히려 요즘 한국 MZ세대들이 선호하는 단짠, 맵짠 등의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너무 깊은 예전 고유의 음식 맛이라 더더욱 놀랐다.


식사를 하던 도중 한국인 사장님이 오셨다. 직원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우리 테이블에 와서 떠듬떠듬 어설픈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아마도 이민 2세쯤 되는 듯해 보이는 30대 사장님께 음식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봤다. 누가 만드는가? 재료는 어디서 구해오는가? 누구에게 음식을 배웠는가? 외국인들이 이런 음식을 먹으면 반응이 어떤가? 궁금한 마음에 쉴세 없이 질문을 했다.


한국어가 어설픈 사장님은 가정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6.25 당시 북한에서 피난 온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한국이 어렵고 힘든 시절 미국으로 이민 왔던 이야기, 당시 한국 식재료가 없어서 한국에서 씨앗을 부쳐와 캘리포니아 땅에 심으며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김치를 담가 먹던 이야기 등등. 사장님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그러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자라면서 한국 음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을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TV에서만 봤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한국 고유의 맛을 지킬 수 있는지 비결을 물어봤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나서는 미국에서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만들고 싶어 한국에 가서 음식을 배워 오면서 음식에 필요한 각종 기계들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주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냉면 반죽을 압축해서 냉면 면발을 뽑는 기계를 보여준다. 요즘에 한국은 전기로 동작하는 기계들을 사용하는데, 이 기계는 80년대 구형 기계라서 지렛대 힘으로 눌러서 뽑는 전통적인 무쇠로 만든 기계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80년대 한국으로 온 것 같았다. 요즘의 자극적인 한국 음식의 맛이 아닌, 80년대 예전의 맛이 살아 있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고수하던 전통 방식 그대로 한국을 한 번도 안 가본 아들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연로한 아버지 대신 가업을 이어받은 사장님은 우직하게 아직도 배운 그대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LA한국 음식 도매상에 부탁하면 냉면 면발은 배달받아서 사용할 수 있을 텐데요”라는 말에 사장님이 놀란다. 냉면 면발을 도매상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듯하다. 순간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여태껏 지켜온 맛을 괜히 공장에서 생산된 면 맛으로 바꾸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힘들지 않냐는 말에 이제는 지역 주민들에게 한국 음식이 많이 알려져서 비즈니스도 안정적이고, 무엇보다 어릴 적부터 먹던 한국 음식이 그리워서 한국 식당을 해야만 한국 음식을 먹을 기회가 생기지,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만 한국 음식을 먹기 위한 재료 준비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한 번도 안 가본 사장님도 그리워하는 한국 음식인데, 한국에서 온 경석 씨는 지난 며칠간 얼마나 한국 음식이 그리웠을지 조금 이해가 간다.


큰 대도시에만 한류 열풍이 있는 것은 아니다. 30여 년 전부터 캘리포니아의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우직하게 배운 대로만 맛을 이어오던 한국 식당 3대의 이민야사(移民野史)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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