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 작가
안개 낀 새벽 산속, 물 위로 번지는 찰랑이는 고요함. 정언 작가와의 대화는 마치 그 풍경을 걷는 일 같았다.
소녀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내면을 오래 들여다보고, 점 하나하나에 감정과 사유를 담아내는 그녀. 흙을 '대상'이라 부르고, 점을 '존재의 단위'라 여기는 그 마음이 초롱하게 빛난다.
그녀가 만든 '방'은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고 자기만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작업을 통해 오히려 ‘타인의 존재’를 새롭게 마주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그 모든 말들 위로, 예술가의 순수한 영혼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0.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도자로 내면의 공간과 개인의 사유를 좀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박정언입니다.
1. 작가노트에서 "점"이라는 조형언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작가님에게 ‘점’은 단순한 시각 요소를 넘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나요?
저에게 점은 저의 내면에서, 저 스스로를 이루고 있는 어떠한 요소 같은 것이에요. 세포라고 가볍게 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작은 단위로 표현한 걸 점이라고 명칭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경험이라든지, 시간이라든지, 그 사람의 생각일 수도 있고 감정일 수도 있는 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저는 작은 점이라고 통틀어 부르고 있어요.
2.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돌고 돌아 나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는 글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작가님의 나에 대한 사유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작품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제가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제 자신을 알고 싶어서 시작하게 된 것이에요. 접근 방식 자체가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요, 당장 내가 알고 싶다고 나를 한 번 생각해 본다고 내가 나오지 않잖아요. 그래서 조금 더 모서리 부분부터 파고 들어가서, 내가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저런 것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그거에 대해 어떤 방식의 사유나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노트나 드로잉을 통해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오, 그러면 내가 나 자신을 알기 위해 그냥 나 자신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외부 환경이나 외부 자극들을 통해 나라는 형태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네, 네 맞습니다.
2-1. 그러면 작가님에게는 왜 자신의 내면세계 - 자아 - 같은 것들이 중요한지, 왜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작업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굉장한 대가족에 속해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옆에 제가 아닌 누군가가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 싫지는 않았어요. 가족들 자체가 굉장히 화목한 가족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싫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그걸 나 혼자 소화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앞에 보여야 되잖아요. 아니면 소화 시간 없이 안에서 담아두고 있거나. 그래서 더 '내 방을 갖고 싶다'라는 굉장히 개인적인 이유에서부터 출발한 것 같아요.
여기서 조금 더 큰 스토리로 이어가 보자면 제가 느끼기에 지금의 모두의 환경이 자기만의 생각을 갖기 힘든 환경에 있는 것 같아요. 정보들이 너무 넘쳐나니까, 이 많은 정보들 중에 진짜 내가 내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들이 어떤 걸까?를 분별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그럴 때 제가 찾고 싶었던 것이 제 자신이었어요. 정말 본연의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굉장히 찾고 싶어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2. 작업을 통해서 자아를 알아가는 과정, 사유하는 과정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작업을 통해서 내가 변화되거나 아니면 좀 확장되는 경험이 있었을까요?
제일 큰 경험은 너무나도 개인의 공간이 갖고 싶어서, 제가 방이라는 주제로 진짜 내 작업들로 어떤 전시 공간을 방처럼 꾸며버리자. 타인이 일절 간섭하지 않는 나의 방을 만들고 그 안에서 오롯한 나만을 바라보자라고 생각하며 작업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까 타인이 없는 오롯한 나는 없는 거예요. 타인의 존재가 있어야, 검은 배경에서 흰색 달이 드러나듯, 뭔가가 있어야 이와 다른 저만의 고요함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걸 작업을 하며 알게 된 것 같아요.
3. 작가님의 세계를 표현하는 매체로 흙을 사용하고 계신 이유가 있을까요?
흙이라는 매체 자체가, 대상 같았어요. 흙이 뭔가를 생각하고 살아있고 이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 매체에 품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들을 되돌아보면 사람한테 느끼는 감정들이랑 너무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얘는 그냥 단순 재료라기보다는 이렇게 내 눈앞에 앉아있는 누군가와 같은 대상으로 느껴졌어요. 그런 부분들이 좀 매력적이어서 흙을 계속 쓰고 있는 것 같아요.
4. 작가님의 이런 작품들이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꽤나 철학적이고 밀도가 높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이제 작품을 만들 때 영감을 어디서 얻는지 포인트가 있을까요?
어떤 한 화면이나 풍경에서 많이 영향을 받아요.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사이로 햇빛이 내려올 때. 그 햇빛이 만들어내는 그 빛감이나 그런 것들보다 그 나무를 통과해서 생겨나는 그림자가 좋아요, 그 모양 같은 부분들이 좋고, 또 아스팔트가 해를 받으면 되게 하얘지는 거 아세요? 진짜 시커먼 아스팔트인데 해를 받으면 되게 하얘지면서 그 굴곡들이 드러나요. 그런 것들도 좋아해요. 그런 부분에서 좋은 감정들이 충족되고, 그 좋은 감정들이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나도 어떤 저런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뭔가 하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동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5. 작가님께서 작업을 하면서 가장 몰입했던 순간이 있을까요? 아니면 가장 좌절했던 순간도 괜찮습니다.
우선 가장 몰입하는 순간은 아무래도 손으로 직접 흙을 만지고 있을 때에 가장 몰입을 하는 것 같아요. 흙의 질감을 하나하나 느끼지는 않아요. 나는 당장 이 전체의 형태를 어떻게 만들어 갈까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무게중심도 생각해야 되고, 가마의 온도에서 여기가 쳐지진 않을까, 와 같은 계산들을 해야 해요. 질감을 느끼진 않지만 그런 계산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냥 만들고 있는 그 순간들이 몰입되는 순간인 것 같아요.
좌절은 아마 도예 하시는 분들이면 다 이해하질 것 같은데, (저도 예측이 되네요) 네. 가마가 생각보다 컨트롤이 안되더라고요. 제가 대학교 때 도예라는 것을 처음 접하고, 내가 만들어낸 작업에 뿌듯함이나 만족감보다 먼저 배운 게 포기였어요. (웃음). 아 이거 나의 영역을 벗어났구나. 근데 도자를 하면서 좀 사람한테도 많이 실망하거나 그런 일이 없는 것 같고, 좀 무뎌지는 것 같아요. (오, 포기를 먼저 배웠기 때문인가요?) 네 (웃음).
6. 작가님은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우선 정말 욕심나는 건 좀 스케일이 많이 많이 큰 작업을 해보고 싶거든요, 예를 들면 벽에 붙는 타일작업인데 전시장의 한 벽을 다 채워버리고, 그거야 말고 공간을 작업하는 작가의 작업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또 해보고 싶은 것은 제가 '문'이라는 작업을 하는데, 그 문이라는 작업의 형태나 성질을 바꿔서 아예 사람이 들어올 수 없게 그 입구를 다 막아버리고 싶어요. 정말 막혀있는 문이 아니라 그물처럼 구멍이 뚫려있는 도자 그물 같은 것으로 입구의 전체를 막아놓고, 시선은 넘어올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물리적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그런 작업을 좀 해보고 싶어요. 안쪽 공간을 체험할 수 없는 식으로요. (어 되게 실험적이네요.)
7. 작가님의 작품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럼 그런 사람들한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혹은 이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이런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을까요?
음, 제가 가장 좋게 생각하는 그 어떤 예쁜 풍경을 봤을 때에 그 감정이 올라왔으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아요. 영감을 받는다고 했던 그런 모습들이 저는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고, 계속 기억하고 싶고, 꺼내서 보고 싶거든요. 근데 사실 이건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기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죠) 그 모습 그대로 담아둘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그게 아쉬워서 작업을 계속하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대중분들이 그런 감정을 느껴줬으면 좋겠어요.
7-1.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느끼신다고 하셨는데, 아까 이쁜 풍경을 봤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말씀하시면서 계속 눈이 초롱초롱하셔가지고... 어떤 장면들을 꺼내고 계신가요?
제가 가끔 꿈에서도 보는 장면이 있는데요, 산에 아침 새벽에 있으면 안개가 굉장히 많이 껴서 한치 엎도 안 보이거든요. 그때 그 저수지 같은 곳에 가면 딱 내 앞에서 물이 그냥 찰랑찰랑 거리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꿈에도 나올 정도로 약간 향수처럼 남아있어요.
8. 정말 마지막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독자분들, 대중분들께 하시고 싶으신 말 있으신가요?
음. 행복해주세요 (웃음).
정언 작가의 말처럼, 어떤 풍경은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남길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 그것을 품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감정의 언어를 찾는다. 그 언어가 그녀에게는 점이고, 흙이며, 방이다.
작가는 오늘도 자신의 손 끝으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있다. 그 손끝에서 태어난 점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잔잔한 떨림으로 다가온다. 그 떨림 속에서,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진다.
행복하라는 마지막 인사처럼. 그 말 하나에 담긴 따뜻한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