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래도 어쩌랴....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난 묵묵히 내 하루를 채워간다.

by 크엘

갑작스런 이별에 마음이 정말 아팠다.

저녁에 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해낸 거라곤 아이들 밥 차려준 게 전부였다. 세수도 스스로 가서 해라. 치카도 스스로 해라. 아마도 치카는 안 한 것 같은 눈치다....


널브러진 날 보고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감지하고 일을 일찍 마치고 들어온 터였다. 집 상태가 말이 아니었음에도 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원래부터가 지저분하다고 잔소리하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의 상태를 보고 짐작 가능했을 거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항상 보여주던 모습 그대로 방방 뛰고 즐거워했다. 간간히 다가와 '엄마 아파?'라고 물으며 날 걱정해 주고는 금세 다시 놀이에 빠져들어갔다.




간신히 잠을 청했지만 새벽 3시에 결국 잠에서 깨어 또 같은 자리에 앉은뱅이 의자를 두고 쪼그려 앉았다. 내가 상상해 봐도 불쌍한 모양새임에 틀림없다. 이대로 두 눈 뜨고 밤을 지새울 수도 없고 상심에 빠져 새벽까지 퀭한 얼굴로 앉아 있다간 날이 밝아져도 일상생활 불가겠지... 하루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럴 때는 야식을 먹고 잠을 청해 보는 수밖에 없다. 레토르트 마파두부를 따끈한 흰밥에 슥슥 비벼 입에 크게 욱여넣었다. 얼마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키면서도 마라 맛이 적절히 잘 베어 들어 웬만한 중국집보다 뛰어난 것 같다는 시식평을 내리고 있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썩 괜찮은 맛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나 원 참, 1초 전까지만 해도 상실감에 빠져 있던 것 아니었나? 간사한 인간 같으니라구...



아침이 됐으나 깨어나질 못했다. 알람이 몇 번이나 시끄럽게 울려댔지만 물 먹은 솜마냥 축 처진 몸뚱아리는 안간힘을 써도 도저히 일으켜 세워지지가 않았다. 계속 자고 싶었다. 자고 또 자고 싶었다.


간신히 일어나 아이들을 챙기며 집안이 엉망인 것을 발견하곤 식세기를 돌리며 아이들 보고 장난감 정리를 하지 않으면 버리겠다고 조용히 엄포를 놓았다. 건조기도 돌렸다. 등원 준비 하다 말고 삼천포로 새 버렸다. 이렇게 쳐져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정말 방치하고 잤던지라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등원시키고 돌아와 두 눈에 힘을 꽉, 팍! 아무튼 힘을 내 몸에 있는 에너지를 최대한 쥐어짠다는 느낌으로 인상을 한 번 썼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안간힘을 다 내 에너지를 쥐어짰다. 바닥 청소를 하고 화구도 닦아주고 샤워도 하고 머리를 정돈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헤어 영양제도 오랜만에 발랐다.


원래 일정대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평온한 골목길을 지나가며 마음속으로 떠나간 친구를 생각하기도 하고 오늘 만날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상당히 복잡했지만 난 힘을 내기로 마음먹었고,

가서 이야기가 나오면 울더라도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렇게, 난 묵묵히 내 하루를 채워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친구의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