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가르쳐줄 사람도 없고, 배워봤자 돈 줄 사람도 없다.
너도 나중에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할 텐데 정신 차려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맞이한 대학 생활 첫 번째 지도 교수 면담에서 들은 말이었다.
여덟 살 무렵이었다. 개나 고양이가 왠지 식상했던 나는 부모님께 졸라 동네 수족관에서 붉은귀거북 두 마리를 데려왔다. 나름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가지 않아 두 마리 모두 죽어나갔다. 하지만 꼬맹이의 호기심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치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그 범위와 심도를 더해 나갔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무렵 나는 레오파드게코를 방에서 번식시키고 먹이용 밀웜을 자체 조달하며 베란다에서 농구공만 한 설가타 육지거북을 키우는 덕후가 되어있었다. 진학 희망 학과는 당연히 생물학과였다.
한양대 생명과학과는 안타까운 영혼들로 가득했다. SKY, 공대, 의대의 문을 통과하는데 실패했으나 생활과학대학을 가기는 싫고, 또 자연과학대학의 물리, 수학, 화학, 생명과학 중에 취직이나 범용성 면에서 생명 쪽이 유리해 보이니 적당히 그곳을 택한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진정으로 이 학문이 하고 싶어 온 학생은 얼마 없을 것이며 파충류를 연구하고 싶다는 뚜렷하고 매니악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에게 어리숙한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한국의 구달이고 조선의 다윈이었다.
너 같은 학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 대신 그러나 내게 돌아온 지도교수님의 대답은 첫 문장과 같았다. 그분 나름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것이었겠으나 꿈에 부푼 21 살짜리에게는 과격하고 잔인한 말이었다. 날개를 달아줄 것이라 여겼던 기대는 오히려 팔다리가 잘리는 배신으로 돌아왔다. 커리큘럼은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 유전학, 생화학 따위의, 이게 화학인지 생물학인지 구분도 안 가는 과목들로 가득했다. 책상 위에서 현미경과 DNA를 들여다보는 것은 내가 그린 생물학이 아니었다. 그나마 생태나 분류학을 하시는 분들도 플랑크톤이나 조류 (새 말고 강에 사는 녹조류 같은 거)를 다루시는 분들 뿐이었다. 내가 그렸던 클래식한 생물학을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성적표는 자연스레 B와 C 투성이가 되었다.
막학기가 될 즈음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졸업을 미루며 버텨보았지만 노력은 물론 방향성조차 애매했던 이력서로는 동기들과 비슷한 수준의 간판에는 비빌 수조차 없게 되었다. 슬슬 심각한 위기감을 느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간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자신과 함께 영국에 가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다. “석사 1년이면 따.” 그 친구는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었지만 나는 이거다 싶었다. 영국이라 하면 진짜 구달과 다윈을 낳은, 그야말로 클래식한 생물학의 성지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래 하고 싶은 거 해보자.
마지막에 내 등을 떠밀어준 것은 용기가 아니라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