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긴 한 달 전, 나는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마이크로소프트. 합격 통지서였다.
나는 열 살이 되던 해 영어 알파벳만 안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을 오기 전 아빠가 한국에서 하는 만큼만 하면 미국에선 1등일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랐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게임을 하고 싶었던 나는 처음으로 내 컴퓨터를 조립했었다. 아마 그때부터 컴퓨터 관련 직종을 하고 싶어 했던 거 같다. 열두 살 정도 됐을 무렵, 개발자가 되면 매일 컴퓨터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처음으로 프로그래밍 언어 책을 구매했다. 나는 그때 그 책을 다 읽으면 개발자가 될 수 있는 줄 알았다. 개발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MIT 입학. 다른 하나는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에 취업.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생 처음으로 좌절을 맛봤다. MIT에 불합격한 것. 하지만 운이 좋게 워싱턴 대학교 컴퓨터 사이언스 프로그램에 합격을 했다. 기쁨도 잠시,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부터 나는 취업 준비를 했다. 목표는 대학교 1학년 이후 미국 IT 대기업에서 인턴쉽.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대학 합격 통지서를 레버리지로 사용해 3개의 스타트업에서 무급 인턴쉽을 했다. 말이 인턴쉽이었지, 그냥 허드렛일만 했다. 하지만 기뻤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었으니까.
대학교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수백 개의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다. 대부분 서류전형도 통과하지 못하고 불합격 통지가 왔다. 최종 면접까지 갔는데 그 후로 소식이 끊긴 회사들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이고 국제 학생이기 때문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구나.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낙담을 한 후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학점관리하면서 취업 준비를 더 열심히 하면 언젠간 기회가 오겠지. 그러던 어는 날, 친구와 컴퓨터 사이언스 빌딩에서 과제를 같이 하던 도중 나는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마이크로소프트. 합격 통지서였다.
내 20대의 시작은 대기업이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였지만 엄마의 기쁨과 놀람이 섞인 목소리는 아직도 생각이 난다. 아빠는 놀라기보단,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로 날 축하해 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들한테도 축하메시지가 왔다. 친척들이 날 대견해하는 거보다 부모님이 친척들에게 날 자랑하는 게 더 기뻤다.
여름이 되었고 인턴쉽은 시작되었다. 인턴쉽이 시작하자마자 집 우편함에 체크가 도착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 달 용돈이 100달러였던 나는 살면서 그런 숫자를 본 적이 없었다. 체크에 쓰여있는 금액은 7000달러. 회사로부터 인턴들이 3개월 동안 미국 시애틀의 비싼 월세를 감당할 수 있게 지급되는 거다. 회사를 2주 다닌 후 스무 살 나이에 처음으로 급여를 받았다. 2주마다 2800달러. 이게 3개월 동안 지속된다.
이렇게나 받는다고? 인턴인데?
대학교 1학년을 한 달에 400달러로 해결하던 나에겐 너무나 큰돈이었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던 나는 돈을 쓰는 법도 몰랐다. 평소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하는 나는 커피 머신을 사고 나머지 돈은 전부 미국주식에 투자했다.
이건 아직까지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인턴쉽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전부 다 본인만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물론 캐나다, 브라질, 스페인, 중국, 케냐, 멕시코, 에티오피아, 베트남, 영국 등등 세계 각국의 나라에서 나처럼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도 많았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 들은 전부 다 명문대 출신이었다. MIT, 하버드, 스탠퍼드, 옥스퍼드, 그리고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중국의 칭화대에서 온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아빠가 10년 전에 말한 게 틀렸었다. 이곳에선 난 절대 1등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회사는 인턴들을 경쟁시키지 않았다. 회사에는 수백 개의 팀이 있고, 인턴들은 자기가 속해있는 팀에 자기가 필요하다는 것만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즉, 본인에게 주어진 프로젝트만 잘하면 된다. 낮에는 팀원들과 회의하고 다른 인턴들과 네트워킹, 밤에는 낮에 시간이 없어서 못 끝낸 프로젝트 진행. 3개월 동안 밤낮으로 열심히 한 결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다음 해 여름에 회사에서 인턴쉽을 한 번 더 할 기회가 주어졌다. 리턴 오퍼를 받은 것이다.
다음 해 여름, 난 다시 회사에 들어갔다. 지난해보다 급여가 올랐지만 불안했다. 인턴들 사이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았다. 금리가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여름, 나는 높은 금리가 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몸소 느꼈다. 새로운 인턴들을 얼마 채용하지 않아 인턴 수는 작년보다 훨씬 더 줄어들었고, 인턴들을 위한 사내 이벤트의 예산도 거의 없었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인턴 수도 정해지지 않았었다. 모든 게 불확실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에게 주어진 프로젝트를 열심히 하는 거뿐이었다. 3개월 후, 인턴쉽이 끝났다. 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아직도 회사에선 아무런 공고가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거뿐이었다. 높은 금리 때문에 다른 IT 회사들도 채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 후, 회사에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나는 이제 마이크로소프트 정규직이다.
스물두 살이 되기 한 달 전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처음 합격 통지서를 받은 지 정확히 2년이 지났다. 정규직이 되고 나서 내 인생은 바뀌었다. 아니 정확힌,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내가 다니는 회사이름으로 내 성공의 척도를 결정하는 거 같았다. 내 또래들은 자기 진로에 대해 묻고, 어른들은 어린 나이에 성공했다며 칭찬한다. 사람들은 나한테 성공의 비결을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운이 좋았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게 이런 기분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사회적 위치와 책임이 생겼다.
내 또래들은 날 부러워한다. 어른들은 날 대견해한다.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생긴다. 받을 수 있는 것과 받을 수 없는 것이 생긴다.
난 어른이 주면 무조건 받는 건 줄 알았다.
나도 그렇게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