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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송 Mar 31. 2021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1975).

당신은 모를 한국고전영화 #1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감독의 작품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이 글은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포문을 여는 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이만희 감독의 유작이다. 누군가의 마지막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그들의 영화가 불멸함을 이야기하기 위함에 있다. 그런 나의 작은 허영심을 이 글에 기대고자 한다.  

  그 기댐의 중심이 될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천재 감독이었다. 한 해에 5편 내지는 6편까지 연출하면서도 작품들은 하나같이 생명력을 가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활극부터 스릴러까지, 이만희 감독은 다양한 장르에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영화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그의 넓은 스펙트럼은 이만희 감독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척도가 되어준다.

  그가 <삼포 가는 길>을 편집하던 중에 쓰러지기 전까지 50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중 절반에 가까운 작품들은 아직도 만날 수 없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가 필름을 보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이젠 되풀이할 수도 없고, 되풀이하지도 말아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디선가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과 함께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발견되어 모두와 함께 감상하는 날이 언젠가 왔으면 하고 아직이 기도해본다.



  

  1975년에 개봉한 <삼포가는 길>은, 황석영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다. 훌륭한 원작만큼 아름다운 구성을 갖춘 이 작품에서 하나 눈여겨볼 점은 백일섭 배우의 젊은 시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등학생으로서 <꽃보다 할배>를 비롯한 예능으로 친숙해진 원로배우의 모습을 70년대의 한국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조금씩 미디어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문숙 배우의 활기 넘치는 연기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눈 덮인 설원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노영달, 정 씨, 백화, 이 세 명의 우정이 담긴 이 영화는 마치 이만희 감독의 유작임을 예상한 것처럼 아련한 이별과 다시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보여주는 결말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삼포는 가상의 도시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방황과 여정을 주제로 하는 장르인 로드 무비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길에서 우연히 만난 세 명의 인물이 눈을 뚫고 감천 역까지 동행한다는 내용이다. 형무소에서 10여 년을 살고 나온 정 씨는 자신의 고향인 삼포를 향하던 중, 일자리를 찾기 위해 떠도는 노영달과 만나게 된다. 영달과 정 씨는 식당에서 주인으로부터 도망간 작부인 백화를 잡아오면 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그녀를 뒤를 쫓게 된다. 둘은 결국 목포로 떠나려던 백화를 만나게 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녀의 기세에 그녀를 붙잡아 넘기는 대신 함께 동행하게 된다. 세 명의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끌고 가는 이 작품에는 70년대의 숨 가쁜 산업화에 희생된 구성원들의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느 문예영화들처럼 원작과 비슷하면서 다른 구성이 있어서 소설과 비교해서 본다면 훨씬 재밌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한국사회의 모습은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다. 향토적인 축제와 전통을 따르는 장례식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알 수 없는 정서를 이끌어낸다.

  장례가 한창인 집에 지인인 척 들어가 낯선 사람들 속에 섞이는 세 명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이내 술에 취해 쫓겨나면서, 그들은 잠시 어딘가에 의지했다가 다시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버려진 폐가에서 눈을 붙이는 그들과, 술집 난동에 휘말린 백화를 구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연기를 하는 정 씨의 모습에서 정처 없이 떠돌며 방황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이 느껴진다.

  백화는 영달과 사랑을 나눈 뒤, 그에게 함께 목포로 갈 것을 제안한다. 끝내 백화의 제안을 수락하지 못하고 기차역에서 세 사람은 이별하게 되지만, 그들은 찰나였지만 깊은 유대를 느낀 지난날을 뒤로 저마다 새로운 삶을 위해 발길을 옮긴다. 영달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며 마음의 고향을 찾는 백화와, 새롭게 일자리를 얻게 된 영달, 그리고 눈에 띄게 성장한 삼포를 마주하는 정 씨는 방황 끝에 무언가를 얻은 모양이다. 이 영화는 10여 년 사이 다리가 놓여 발전한 가상의 고향 '삼포'를 향한 여정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일구어낸 한국의 눈부신 성장을 담아낸 듯하다.

  다시 방황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삼포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만연한 이들에게 이 영화 속의 이들처럼 화합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다려본다.


*해당 작품은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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