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어 W. 아도르노, 『신극우주의의 양상』, 문학과지성사
4년 전쯤, 손을 씻다가 왼손 약지에서 오돌토돌한 돌기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곧바로 피부과를 향했다. 7살 때 발바닥에 난 사마귀를 칼로 제거했던 외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피부과에서는 냉동치료를 권장했고, 학생 신분으로는 적지 않은 비용이었지만 3번 정도 치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4번째 치료를 권유하셨지만, 체감상 3번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 전, 오른손에 가벼운 화상을 입고 물집이 생겼다. 물집은 터졌고, 그 자리에 수상한 딱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떠한 기시감 탓에 수상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피부과를 찾았다. 일단 사마귀는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상처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확답은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건물을 나서며 불안이 물음표를 달고 따라온다. 이내 그것은 느낌표로 바뀌어서. 이건 사마귀가 맞아. 4번째 치료를 받지 않았던 탓에 마저 사라지지 않은 약지의 잔존한 사마귀가 다시 찾아온 것이라고.
업보 또는 카르마라는 비과학적인 개념은 종종 불행이 겹친 시기가 찾아오면 문득 마음속을 방문한다. 그 나약함을 경험한 어떤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실체를 만들어낸다. 파시즘이라는 이름으로.
『신극우주의의 양상』은 1967년 4월 6일 오스트리아 사회학생연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빈 대학에서 이루어진 아도르노의 강연록이다. 그는 먼저 파시즘 운동을 '민주주의의 상처이자 흉터'라고 설명한다. 1964년 서독에서 창당된 NPD(독일민족민주당)이 1966년 서독의 일시적 불황과 함께 무서운 성장을 보여주던 당시의 시대에 대한 진단으로써, 신극우주의를 언제든 다시 배태할 수 있는 사회구성체의 문제를, 아도르노는 역설하는 것이다.
자본의 집적 경향과 민주적 절차가 모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형국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대로 '인식적 지도 그리기', 또는 계급의식을 통해 파편화된 동시대를 헤쳐나갈 것을 필요로 한다. 나는 여기서 아도르노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하는 지점 중 하나인 테크놀로지의 측면을 떠올린다. 그의 시대에선 '자동화'라고 호명되던, 우리에겐 디지털화 또는 AI가 불러올 하나의 특이점은 가뜩이나 파편화된 노동자의 경험을 완전히 장악할 것이 예견되기 때문이다(이는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든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테크놀로지의 신화는 권위주의적 인격과 너무나 쉽게 결합된다.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꼭 챙기는 그들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2월 28일 젤렌스키와 트럼프의 회담을 보고도 자신의 권위주의적 인격에 확신을 더하는 극우 지지자들을 생각해 보자.
"정신분석적 설명을 따른다면, 이런 운동들에 동원되는 힘 중에는 재앙과 파국을 바라는 무의식적 소망에 이끌리는 힘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이런 행동이 결코 심리적 동기에서만 나오지 않고 자신의 객관적인 토대를 지닌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몰락하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모두가 몰락하기를 바랍니다." -p.20
경험적인 차원에서 미루어 짐작해 보아도, 라캉이 지적했던 일종의 죽음충동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에서 자기파괴적인 어휘를 동원해 "어차피 자살하면 그만이야."를 되뇐다. 그리고 자신과 반대편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이재명 당시 대통령 후보를 언급하며, 본인이 위협받는 듯한 상황에 처하기만 하면 '이재명을 뽑겠다'는 표현을 내뱉는 것 역시 정치를 분명히 하나의 파괴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아도르노가 지적하는 신극우주의의 '세계 몰락의 판타지'다.
이 아도르노의 지적 자체, 파시즘 운동을 방어하는 유일한 조치는, 그러한 정치(파시즘)가 그 정치를 따르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재앙으로 몰고갈 수밖에 없고, 이미 그것이 그 계산에 들어가 있었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바이마르 시대의 극우주의와 1945년 이후의 극우주의가 갖는 차이는 그것의 맥락이 이번에는 패전의 후유증 위에서 이뤄진다는 것, 그래서 윤리적 호소가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이라는 것과, 신극우주의로 인해 세계정치로부터 변방화되어 가면서 재생산되는 공포가 정치적인 복합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공산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서 떨어져 나가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이미지, 즉 이마고(Imago), 그저 공포와 위협을 수행하는 기표로만 기능한다.
"(...) 오히려 참된 것이 이데올로기적인 허위를 위해서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서려면 거짓을 위한 진리의 오용을 비판하고 거기에 맞서 저항하는 고도의 기술이 본질적으로 필요하다는 점도요. 진리를 비진리에 봉사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그 자체로는 참되거나 올바른 관찰들을 그것이 속한 맥락에서 떼어내어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p.38
아도르노는 독일이 냉전의 블록 시스템 속에서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일종의 '자립 콤플렉스'가 당시 주목받던 반미주의와 엉켜있다고 분석한다. 이는 괴벨스의 방식과도 유사하게 자유를 철폐하는 단적인 결단을 통해 잠시나마 자유로워졌다는 효능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한 권위주의적 인격의 구조를 보여주며, 그들은 이러한 사실 앞에서는 분노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아도르노의 지적대로, 그 정치가 지닌 예견된 파멸의 필연성을 웅변할 것을 요구받는다.
일명 '살라미 소시지 법'으로 비유되는 극우주의자들의 구체주의(Konkretismus) 방법론은 지극히 부분적인 문제를 지적함을 통해 그 전체를 의심할 만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예를 들어, '학살된 유대인은 600만이 아니라 550만 정도야.'라는 말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통계 자체를 뒤흔든다. 덧붙여, 극우주의자들이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여성, 아이들, 성소수자 등의 약자들에게 징벌 콤플렉스를 반영하는 현실은 60년이 지난 한국에서 여실히 작동하고 있다. 이대남이 그토록 파편적으로 서로 다른 담론에 천착하면서도 '안티페미니즘' 앞에서 단결하는 모습은 권위주의적 인격이 세대를 뛰어넘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준다.
아도르노는 끝으로 자신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이성의 긍정적 개념을 다시 모색하려고 했었던 맥락을 따라, '이성을 통해', '비이데올로기적인 진실'을 통해 신극우주의를 극복하자고 강조한다. 극우주의자들이 이성과 감성의 폭력적인 이분법을 통해 이성의 가치를 본인들의 전유물로 간주하는 것, 그 도구적 이성을 이성의 이름으로 되물어볼 것.
방점은 역시 극우주의 앞에 붙은 신新에 있다. 장재현이 아주 시의적절하게 '파묘'의 화두를 작년에 던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그것은 분명히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다. 12.3 내란의 출발점을 가깝게는 2016년의 박근혜 국정농단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가 아주 잘 경험한 것처럼 그 이후의 정치적 하부구조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좌절된 변화의식은 보다 노골적인 적을 불러온다. 박근혜가 계엄 카드를 조물거리는 동안, 윤석열은 주저 없이 최소한의 절차였던 국무회의부터 가볍게 무시하고, 포고령에 국민을 '처단'할 것을 분명히 하고, 국민의 목숨을 볼모로 국지전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마치 박정희의 10월 유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광주시민 학살, 한나라당의 총풍사건까지 환기시키고자 하는 퍼포먼스처럼 보일 정도다. 파시스트의 정치가 여전히 작동하는 한, 언젠가 포스트 윤석열은 더 강하게 한국에 도착할 것이다.
2025년의 한국은 신극우주의의 출현에 '냉동치료'를 시도하고 있는가? 감염된 살점이 괴사 되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치료로 이어지지 않고 '냉동'에 그칠 것이다. 지구열대화 탓에 극지방의 고대 바이러스들이 귀환하는 것처럼, 나치가 이번에야말로 자기확신에 차서 백악관에 귀환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