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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Apr 09. 2022

서울살이를 포기하고 곡성에 살기로 결심한 이유

<1화- 정말 다 뜻이 있는 것일까?>

2022년 1월, 3개월간의 시간을 보낸 독일에서 막 돌아왔다. 입국 후 PCR 검사에서 오미크론 양성 판정을 받아 2주간 격리했다. 격리하는 기간 동안 건명원에 제출할 지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건명원이란? :  '건명원(建明苑)은 “문화예술분야”의 창의적 리더와 인재육성을 위해 (재)두양문화재단에서 설립 및 운영하는 인재육성의 산실입니다. 특히 19세에서 29세 사이의 청소년들이 창조적 문화예술의 향기속에서 미래의 꿈과 비전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사업을 실시하고자 합니다.' <건명원 홈페이지 소개란>


2년 전 세계여행을 다녀오고 앞으로의 계획이 없어 방황하던 시절 아버지가 건명원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무엇을 하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주변에 새로 알게 된 사람들 중 참 매력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 드는 상당수가 건명원을 졸업했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건명원이라는 곳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 들어볼 수 있었다. 질문하고, 탐구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며 시대의 반역자를 양성해내는 곳이라 이야기해주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년 동안 오상현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물아봤을 때 레스토랑에서 육체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공부하는 정신적 행위를 더 좋아한다고 느껴졌다. 특히 조리고등학교 특성상 교육과정이 실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중학교 이후 제대로 된 ‘학문적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배움에 대한 갈망이 최근 매우 짙어졌다. (사실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오지선다형 교육과정이 너무 재미없었다)


건명원 졸업한 지인들도 합격할 것 같다고 했고, 스스로도 정규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벗어난 길을 걸어왔다 자부하기에 이미 마음은 합격 후의 생활을 그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어디에서 지낼지, 북촌에서 수업을 들으면 어떤 느낌일지, 그곳에 온 동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하며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설 연휴 전 발표된 결과는 서류 탈락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반역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나름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탈락하니 상당한 무력감을 느꼈다. 분노의 5단계처럼 처음에는 '실수로 이름이 누락되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이 상황을 부정하고 '왜 나를 안 뽑았지?'라며 분노했다. 이후 '나라는 사람은 별 가치가 없구나'라며 내면과 타협하고 우울해하며  체념하기 시작했다. 특히 우울감과 납득이 극심하게 다가왔다. '23년 동안 살면서 나에게 남은 것은 뭐지? 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라며 절망했다. 죽음의 바닥에서 기어올라와 이제 좀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만끽하려고 했던 2022년의 삶. 그 시작부터 완전히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항상 그래 왔듯이 다 뜻이 있겠지'라고 스스로 정신승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 계획대로 안된다고는 하지만 그게 왜 하필 지금 일어나는지 원망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힌 나머지 바다를 보고 싶었다. 설 연휴 동안 가족과 함께 포항으로 여행을 갔다.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 부모님이 ‘곡성의 미실란'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시간을 조금 되돌린 작년 12월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한 달 동안 동네에서 진행되는 문화행사 소식을 모아둔 월간지를 읽으시다 근처 도서관에서 ‘농부 과학자와 소설가'라는 제목의 강연이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농부와 과학자의 조합이 궁금해서 어머니와 함께 강연을 참석하셨다. 강연 다음날이 마침 소설가분의 책방 오픈식이어서 바로 곡성으로 달려가셨다.


다시 2월의 포항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작년에 곡성에 갔는데 항상 네가 이야기했던 농사부터 요리까지 하는 곳이 있더라. 그곳 대표님을 아니깐 가서 한번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네가 해보고 싶은걸 미리 하고 있는 분이니 엄마, 아빠와는 다른 또 여러 가지 조언들을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아' 하셨다. 마침 포항에서 대구 오는 길에 설에 방영된 미실란 다큐멘터리를 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무언가 머릿속으로만 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지쳤다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고,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함께 곡성으로 향했다.


건명원에 탈락한 후 계속 고민이 깊어지고 컨디션이 안 좋았기에 어떤 큰 기대나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대구에서 곡성까지 직접 운전하는 동안 잡념이 사라져 좋았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지날 때 즈음 갑자기 눈이 내렸다. 눈길을 통과하고 도착한 곡성의 날씨는 제법 쌀쌀하고 흐렸다. 정말 큰 운동장에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참 인상적이었다. 미실란 밥카페에 가서 나는 돈까스를 주문하고 어머니는 덮밥을 주문하셨다. 밥을 다 먹고 옆에 카페로 자리를 옮겨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2시간이 넘게 대화를 이어갔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버지와 대표님 두 분의 배경과 더 나아가 가족 자체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두 분 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일구어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는 것. 또 서로의 자녀끼리도 1,2살 밖에 나지 않으니 비슷한 생애주기를 걷고 있었다. 특히나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낸 사람들 특유의 악착같음이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맥락 중 다수가 아버지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것이다.


유사한 배경에서 우러나온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지만 누가 하는가에 따라서 와닿는 것이 달라졌다. (누가 더 좋고, 잘난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위치의 사람이 해주는 말과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건강한 먹거리, 깨끗한 음식이라는 같은 꿈과 이것을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서울대라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당시 고등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에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이날 집에 와서 저녁에 적은 글이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모든 것이 귀에 들어왔다거나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보였습니다. 내가 지금껏 경험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궁금해한 것들이 불필요한 것들이 아니라 가치를 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도록 도와준 것 같습니다. 조리고등학교를 나와서 사찰음식을 배우고 Farm to the table을 지향하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배우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 최고의 장소인 것 같습니다.”한마디로 ‘나 자신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고, 헛살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준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가치라는 단어를 참 오랜만에 들었던 것 같다. 세계여행을 갔다 온 후 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한 상태였다. 이 상태로 군대에 갔고 그 끝은 '비합리적 신념'이라는 칼날에 찔려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 후 재활을 하면서 이제 숨통이 좀 트이는가 싶었는데 건명원에 탈락하면서 좌절한 그 순간, 멘탈이 갈리는 그 시점에 ‘네가 이때까지 걸어온 길이 가치가 없는 게 아니야. 잘하고 있어' 이런 말을 들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함께 간 어머니도 ‘정말 오랜만에 너 얼굴에서 미소가 보이는 것 같다'라고 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표님도 한번 이력서를 내보라는 말에 입사지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실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김탁환 소설가 분이 곡성에 머물면서 쓰신 미실란에 관한 이야기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자'라는 뜻의 미실란(美實蘭)이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꿈을 꾸고, 이를 직접 찾아가고 있구나'를 느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어떠한 기업, 공동체,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도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인데 영상이나 글로써 기록을 남겨두면 그들이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를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지를 정말 가깝게 알 수 있구나를 느꼈다. 기록물이 단순하게 어떤 순간을 담아내는 것만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구나를 깨닫게 된 순간이다.


미실란이라는 곳을 선택한 몇 가지 이유들에 대해서 나열해보고자 한다.   


[현실에 발을 디딘 이상주의자.]

고등학교 졸업 후의 지금까지의 삶에  ‘그래서 당신은 지난 시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항상 이상을 가지고 꿈만 꾸었지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내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걸 이미 하는 곳에 가서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기회라고 판단되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바탕이 되면 모든 것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 최재천 박사님에게 푹 빠져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다양한 것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 가지 우물만 파야한다', ‘끈기가 없다'라는 말들에 휘둘렸다. 하지만 박사님은 다양한 것에 흥미를 가진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분야를 교차할 때 완전한 새로움이 탄생하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바탕이 될 때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머릿속에 품고 있었는데 눈앞에 바로 ‘농부 과학자와 소설가'가 나타났다.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더라도 옆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어깨너머로 배우고 또 나중에 다음 스텝을 밟을 때 좋은 조언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래의, 동료의.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것.]

나의 가장 큰 공백 중 하나이다. 좋아하는 운동만 보더라도 수영, 달리기, 자전거처럼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해본 경험 자체가 드물다 보니 협업 능력과 인간관계를 풀어나가는 힘이 부족했다. 여행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과 회사에 들어가 조직생활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느껴져 두려웠다. 또한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많이 지쳤던 것 같다. 건명원을 갈망했던 이유 중 하나도 동료들을 만나고 싶었다. 미실란에는 신기하게도 청년들이 많았다. 대학에서 농생명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 전통주를 배운 사람, 필리핀 NGO에서 5년간 봉사하고 온 사람,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2년간 NGO 활동을 한 사람 등 수많은 배경이 사람들이 함께 일한다. 이들이 같이 꿈을 꾸고, 나아가고자 하는 또래의 친구들이라는 사실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Seed to Happiness(종자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한 순간까지).]

지역 농장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을 식탁에서 소비하는 운동인 팜 투 더 테이블(농장에서 식탁까지). 이곳에서 더 나아가 '정말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항상 종자가 나온다. 우리 입속에 음식이 들어가는 찰나에서 되짚어 보면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그들이 사용하는  식재료, 이를 생산하기 위해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농사, 농사를 진행하는 농부, 농부가 사용하는 종자.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가장 최대치는 결국 종자일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꼭 종자부터 농사, 생산, 유통 그리고 레스토랑 (F&B)까지 하나의 밸류체인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 미실란은 실제 쌀 품종부터 연구해서 유기농으로 농사를 진행하고 수확한다. 이후 이를 가공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판매도 하고, 바로 옆 레스토랑에서 경험해볼 수 있다. 정말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있었던 구상을 현실로 접하면서 ‘이건 이렇게 운영되는구나. 나중에 나는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것을 직접 느끼고 배우고 싶었다.


처음 곡성과 미실란을 방문  4 만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1주일 만에 면접을 보고 3월부터 근무하게 되었다. 돌아보니  스펙타클하게 살았고 체코의 철학자  파토카가 이야기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시험은 자신이 마음먹은 것을 실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운명이 정해준 역할을 실현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곱씹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건명원에 떨어진 것도,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곡성에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도  뜻이 있기에 그런 것인가. 신이 얼마나 달콤한 선물을 숨겨놓으셨기에 이런 장난을 치시는 걸까.


출퇴근길. 소년이 청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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