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빈 Jul 02. 2022

나는 스티브 잡스가 아니었던걸

<12화 - 곡성 100일 차, 순서가 있는 법>

‘생산성의 핵심은 뭔가를 더 많이 더 빨리 해내는 것이 아니다.
 옳은 일을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해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해내는지 안다. 크리스 베일리 지음



이번 글은 곡성 귀촌 100일 차, 얻은 것과 잃은 것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 '배움에 대하여'입니다.



[3. 배움에 대하여]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과거에는 배움을 시작하기 전  ‘이걸 어떻게 하면 더 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매번 무언가를 시작하지 못했다. 시작하더라도 ‘음 이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와 방향이 있을 것 같은데?’라는 방법론에 빠지기 일수였다.


곡성으로 귀촌한 직후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 유튜브에서 검색하고 있었다. 영상 속 유튜버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독일어 공부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나는 얼마나 독일어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 문장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계속해서 노출시켜 어느 정도 쌓여야 손 볼 수 있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효율성만 찾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되었다.


새로움에 접근할 때 일단 친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주 보고 경험하고 만나야만 가까워질 것이다.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어떻게 음을 완벽하게 타건하지?’ 영어를 배울 때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발음하지?’ 수영을 배울 때 '어떻게 완벽하게 물을 끌어당기지?' 보다 일단 많이 쳐보고, 자주 듣고, 꾸준히 수영장에 나가야 부담 없이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대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헤밍웨이가 그랬듯, 인생이라는 장편을 탈고하기 위해서는 더 쓸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내려놓아야만 할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그전에, 부담스럽지 않고 '쓸만하다'라는 느낌이 들도록 일을 나누어서 접근해야 한다. 10시간을 투입해야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한 번에 10시간을 투입하면 지쳐 쓰러지겠지만 1시간씩 10번 나누면, 더 적게는 30분씩 20번을 나누면 무리하지 않고 재미를 유지하며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겁나는 양이면 어떻게 꾸준히 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장기적 시각입니다". 1997년 아마존 주주서한.

우리는 우리가 장기에 걸쳐 창출하는 주주가치가 성공의 기본적 척도가 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가치는 기존 시장에서의 선도적 위치를 공고히 하고 확장하는 우리 능력의 직접적 결과일 것입니다. (…) 장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타 기업들과는 다른 결정을 내리고 거래의 비중을 다른 곳에 두곤 합니다. 우리는 단기적 이윤이나 월스트리트의 반응에 좌우되지 않고 항상 장기적인 시장 주도자의 시각에서 투자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발명과 방황-제프 베조스 지음]


아마존 창립자 베조스 아저씨는 항상 이야기한다. “우리는 절대 Day-1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모든 의사결정은 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장기적 사고를 통해서 내려야 합니다.” 비합리적 신념이라는 단어로 정리된 21살 이전의 삶은 그저 맹목적으로 빠른 성장, 빠른 성공, 빠른 결실을 추구했다.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뒤, 양옆, 위아래 보지 못한 대가는 죽을 만큼 혹독했다.


올봄, 텃밭을 가꾸고 직접 농사를 지어보면서 무엇을 놓쳤는지 깨달았다. 수확을 하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햇빛을 받는, 시간과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 순서가 있는 것이다. 씨앗을 심기도 전에 수확을 할 수 없다. 이 과정을 내 삶에 대입해보니 밭도 안 갈았는데 벌써 열매를 수확해 달콤함을 즐길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이상은 잘 익은 과육을 베어 물고 있는데 현실은 풀이 뒤덮인 황무지다. 이 간극에서 괴롭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망상妄想이 아닐까. 방법은 두 가지 인 것 같다. 시간을 두고 자신의 능력을 한 단계씩 쌓아가던지, 아니면 이상을 낮추던지. 배틀그라운드를 출시해 게임의 명가를 세우고 크래프톤의 수장이 된 김창환 대표가 "내가 쉽게 하면 남들도 쉽게 하고 내가 어렵게 하면 남들은 따라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정말 천백번 맞는 것 같다.



텃밭에서 기른 오이로 피클을 담구었다. 이를 위해서는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자연이 도와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몇 달 전 본 영상을 통해 20대에는 무언가를 창조해내기보다 스스로를 낮추어 끝없이 배우고 경험해 나중에 사용할 재료들을 탄탄히 준비해두는 시점이라 믿게 되었다. 물론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처럼 탁월한 능력이 있으면 20대에도 세상을 뒤흔들 엄청난 걸 창조해낼 수 있겠지만 나는 이들처럼 대단하지 않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한때는 세상을 뒤흔들 만큼 엄청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경험하고 이 과정이 쌓여야 역랑이 되고, 역량이 준비가 되어야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믿음은 모든 걸 경험하려 하고 모든 걸 생각하려 하고, 모든 걸 기록하려고 하는 현재의 상태를 설명해준다.


인간은 20대에는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단계고, 30대는 그 준비된 것을 가지고 실행하는 것이고, 40대는 실행된 것을 지키는 겁니다. 30에 실행하지 못하면 40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20에 준비되지 않으면 30에 실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하루하루가 자기 미래를 결정합니다. 정말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진저리가 날 정도로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자각을 해야 합니다.

<W를 찾아서, 시골의사 박경철>


장기적 관점을 가진 후에는 꾸준함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최근 배틀그라운드의 성공방식을 기록한 크래프톤 웨이를 읽었는데 이 책에서 지속성에 대해 아주 적나라하게 나온다. 그들도 엄청난 삽질과 수많은 실수들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멈추지 않았고 성찰을 하며 짙은 안개 숲 너머의 ‘게임 제작의 명가'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 결과 끝내 그들은 명가의 반열에 올랐다던 것이다. (정작 배틀그라운드 이야기는 책의 10분의 1만 차지한다. 나머지 9할은 실패하고, 실수하고, 다시 도전한 이야기였다)


매일 눈에 보이지 않는 겹들이 쌓여 어느 순간 특이점을 지나고, 이때 지금껏 구축해둔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운동을 즐겨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결코 하루아침에 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매일은 못쓰더라도 꾸준히 일기를 써왔고 세계여행을 하면서 잘은 못쓰더라도 꾸준히 관찰하고 기록해왔다. 고등학생 때 매일 10분씩이라도 달리기를 하려 했고 체력을 키우려고 했다.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이 채워지니 철인 3종을 출전할 수도, 브런치에 올린 글들이 곧 100만 조회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17.07.25. 과거의 의사결정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것.

장기적 관점으로 꾸준함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 때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무언가를 시도할 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10년 뒤에는 즐길 수 있는 수준이 되겠지'라는 가벼운 믿음으로 접근한다. 어릴 적 K- 학원인 피아노-미술학원-합기도 이후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피아노를 최근 다시 배우고 있다. 이때 ‘나는 내년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할 거야!’라고 접근하면 제 풀에 먼저 기죽지 않을까? 이상은 조성진 피아니스트처럼 멋지게 치는 것인데 악보도 제대로 못 보는 현실에 엄청난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 장기적 관점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장기적 관점으로 진행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일단 불을 끄고 살고 봐야지 어떻게 다음 수, 다다음 수를 생각할 것인가? 지금 21살의 나는 피아노를 잘 못 치더라도 10년을 배우면 31살의 나는 즐길 수 있는 수준이 될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배워나가고 있다. 속으로 ‘10 지나도 31살이 엄청 젊은  아니냐?’는 속삭임과 함께. 매일 1시간씩, 몸과 정신에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딱 즐길 수 있는 속도로 , 꾸준하게 해 나가는 것이 내 삶에는 잘 맞는 것 같다. 끝없이 되새기고 있다. 필요할 때 준비하면 늦고, 준비해서 필요할 때 사용해라’




대문 사진은 2018년 1월, 볼리비아 와이나포토시. 6088m(Huayna Potosi)를 등반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곡성 100일 차, 귀촌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