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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영 Jun 11. 2021

'별'에서 우리를 지켜 볼 그를 생각하며...

우리의 소중한 친구 오**이를 보내고 돌아와...

"선생님... **이가 숨을 안쉰다고 어머니가 울면서 전화하셨어요.. 어쩌죠??"

아닌밤에 홍두깨라고 팀장의 다급하게 흐느끼는 전화목소리는 모처럼 주말을 맞이하여 서울가 조조 영화관람을 위해  서두르고 있던 나의 뒷통수를 망치로 가격한 듯 순간 멍~했다.

허둥지둥 5분거리의 오**이 집에 도착하니 119차가 즐비하게 소음을 내고 멀리서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울음소리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멍하게 서있는 내게 한 경찰관이 다가와 관계를 묻고 들어가서 어머니를 위로해 주시라고 한다. 인공호흡기 소리가 규칙적으로 삐~ 음을 내며 모두 침묵한 가운데 어머니의 통곡소리만이 정막함을 방해한다.


  응급실로 옮겨진 그의 발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작고 못생긴 기형의 발로 지구의 중력에 맞서 살아온 19년의 시간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까 싶은 마음에 소리없이 흐느끼며 차가운 발을 어루만지는 것 외에는 할일이 없었다. 그간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겼기에 갑자기 들이닥친 그의 죽음은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고 정말 꿈만 같았다. 말로만 듣던 시설 장애인의 죽음을, 머리 속으로만 상상했던 모습이 실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 졸지에 명을 달리한 아들죽음의 현실 앞에 아버지는 피의자로 경찰의 조서를 받게 되었고, 나역시  참고인 자격으로 3시간 넘게 이런저런 사실들을 진술하게 되었다. 세상이 하도 험난하니 어쩔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망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어떻게 살다 갔는지 알지 못하는 의사나 경찰은 억울한 죽음이 아님을 밝히는 과정이라 이해하며 슬픔을 뒤로 하고 협조 할 수 밖에 없었다.

장애로 인해 힘든 삶을 마감한 자식의 죽음앞에서 종종 일어나는 부모에 의한 장애자녀 살해사건을 사회면에서 대면했던 경험 탓에 형사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당연하게 내게 묻는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한 양해도 구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가족들이 이번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시나요?"


  상상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종합적이고 이성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사실 오**이는 우리나라 장애인의 경.중 등급 중 가장 심한 1등급이고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그동안 위기도 몇번 있었고, 지난 해 부터 계속 병원신세를 졌지요. 부모에 의한 사망은 상상할 수도 확률적으로도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능성이 전무합니다."  

그러자 내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지요?" 한다.

할 수 없이 그간 가족들의 노력을 줄줄이 부연하여 밝히기 시작하였다. 오**이를 위해 눈물 겨운 가족들이 노력해 온 시간들을... 그리고 궁극에는 서울에서 양평까지 매일 아이의 등하교를 돕다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고 이는 캠프힐 도토리하우스라는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부모님의 오롯한 오**이의 좋은 교육환경, 삶의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끝을 맺었다. 사건은 주말임에도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게 되었고 늦은 밤 사망진단서 발급을 받게 되었다. 가족들과의 상의를 통해 오**이의 장례는 없이 화장하기로 하였고 그렇게 짧은 19년의 생을 마감하고 한줌 흙으로 돌아온 그를 하우스 앞 사과나무 밑에 묻었다. 캠프힐장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캠프힐마을 장'이라 여기며 꽃을 놓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였다. 그 배웅길에는 슈타이너학교 시절 오**이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선생님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오**이와 함께한 시간을 추억하고 영정앞에 하얀 국화꽃을 놓아 그의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오**이 우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10년 1월.. 1학년 입학면접 차 방문한 때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아이가 장애를 이유로 누군가에게 차별받거나 함부로 취급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새로 문을 연 슈타이너학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몰래 3차례 학교를 염탐하고 갔고 결국 기존의 슈타이너학교 아이들이 행복하게(외현적으로)지내는 것 같다는 확신을 갖고 입학을 결정한 것이다.

그해 신입생 2명이 입학의뢰를 하였는데, 비영리기관으로 정부의 도움없이 후원으로 운영을 하는 대안학교이다 보니 가능하면 교사의 케어가 좀 덜한 친구들이 오면 좋겠다는 어이없지만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이와 윤**이는 각각 나름 손이 많이 가는 친구라 여겨져 초기 중재 치료를 겸한 치료사겸 특수교사를 열심히 수소문하여 찾게 되었고 그는 그렇게 슈타이너학교에서 울고 웃고, 유소년기, 청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사실 오**이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캠프힐마을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오**이는 우리의 시련과 기쁨을 올곳이 함께한 역사같은 존재이다.


  새로 신복리에 부지를 마련하고 이전을 준비하던 중, 의견이 양분 된 부모들의 의견을 모우기 위해 힘겨워 하던 때, 오**의 가족은 어느 가족보다 내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결국 그렇게 잔류한 최후의 가족이었다. 법인설립과 이혼소송 사이에서 법인재산을 지키기 위한 두려움에서도 오**이의 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사실을 알리고 의논하였고, 결국 오**이의 누나가 결혼으로 분가한 후 가족 모두가 캠프힐마을 아랫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고, 아버지는 우리 법인에서 함께 일하는 진정한 한 가족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이가 아니면 캠프힐마을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늘 하던 다짐은 '슈타이너학교 학생이 1명이라도 남아서 캠프힐마을에 대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면 이일을 계속 준비 할 것이고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나는 다른 일을 할것'이라고 선언했던 탓이다.  그 여정에 오**이는 온전하게 참여했고, 2년전 가을, 캠프힐 도토리하우스 1호 입주 빌리져로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이곳에서 졸업을 하였다. 캠프힐 청년공방학교에서 배움과 일을 계속하였고, 도토리하우스에서 삶을 나누는 그 첫번째 수혜자였다.


  올해는 여러가지로 오**이가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간 슈타이너학교 학생 시절 그의 생일인 5월이면 모두 입을 모아 궁금해 하였다. 올해는 과연 오**이가 생일잔치의 주인공으로 생일을 잘 받아들일까의 의문이었다. 오**이는 자신의 생일잔치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생일을 강하게 거부하였다. 어느해의 생일은 말 없이 눈물을 계속 흘려서 보는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하기도 하였다.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이 한 말을 상대가 못 알아 들으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슬픈 눈빛을 보내곤 하여 때로는 상대가 그의 말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듣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도록 만들기도 했다. 야구게임을 이해하고 야구관람을 즐거워 하였고, 음악이라면 어떤 장르의 노래도 한번 들으면 다 기억하여 부르곤 하였고 겨울왕국을 반복해서 들으며 편안해 하였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몸으로 보여주었고, 터전 이전기념과 빛누리잔치를 함께했던 그해에는 '베니스의 상인'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무대에 나오지 않아 관람객들의 애를 태우다 선생님이 오**이가 있는 곳에 책상을 들어 옮겨 그곳을 무대로 만들어 관람객들로 하여금 감동과 배움, 돌아봄을 선물해 주는 새로운 역할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움직임과 음성 만으로도 그의 힘듬을 미뤄 헤아려 주는 친구였고, 내게는 나의 권위에 서슴없이 도전하여 말 따라하고 비아냥 거리기와 심지어는 '선생님'을 뺀 '김은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함께 밥을 먹으며 오고가는 농담코드를 이해하고 낄낄거리는 유일한 친구였고, 꼬맹이 김**이가 처음 도토리하우스에 입소하여 낯선 환경이 힘들어 울면 어느새 그의 옆에 앉아 등을 토닥여 주는 친구였다. 부실한 건물 공사로 거실에 물난리가 났을 때에는 시키지 않아도 어디선가  물걸레를 찾아와 함께 거들어 주었고, 다급한 상황이 되어 스스로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간절히 말하고 돌아섰을 때 앞뒤를 바꿔 입은 바지에 양말까지 초 스피드로 해결하며 상대방의 사정을 헤아려 주던 맘씨 고운 친구였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죽음을 대할 때 자신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것이라 생각해서 죽음으로 인한 헤어짐을 슬퍼한다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저 그가 먼저 간 것 뿐이고 우리도 곧 뒤따라 갈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슬픔을 청산하지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너무 갑작스러운 준비없는 이별이라 어질거릴 뿐이다. 바쁜 일상이 슬픔을 덮어줄 때가 있다. 그를 보내고 이번주 정신없이 몰려오는 일을 처리하다 어제 다시 그를 생각하며 울컥거리는 마음을 다잡아 이렇게 글로 그를 잃은 슬픔을 '소멸'해야 겠기에 끄적여 본다.


"오**아... 우리의 No1. 친구,  

오늘 밤에도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 볼꺼지?

우리 마음 속에 너는 영원한 우리의 친구야..

그곳에서도 '김은영!!'이라고 불러주길... 그립네..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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