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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영 Jun 15. 2021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시간

중년의 방황, 그리고 새길을 향해..

 

또 다른 길을 떠나며...
     

“선생님.. 학교 졸업하면 내 아이가 어떻게 될까요?”

“......”

특수교사로서 부모님들과 상담을 하면 늘 해결책 없는 결론에 이른다. 방학이면 아이들의 미래를 고민했던 부모님, 동료 교사들과 장애인 시설을 돌아보는 계획을 갖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나섰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늘 실망감과 또 다른 걱정에 휩싸이곤 했다.

‘내가 죽고 난 후 이곳에 아이를 평생 살게 할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늘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폭파되었던 충격의  다음날, 15년간 고이 간직했던 교직이라는 철밥통을 박차고 발도르프 특수교육에 빠져 40세 늦깎이 유학생이 되어 홀연히 독일로 떠난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거슬러 고난과 기쁨의 시간인 5년을 독일의 중서부 지역 비텐 발도르프 사범대학에서 보내고, 소문으로만 듣었던 영국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최초의 장애인 공동체 캠프힐(Camphill)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12년간의 학령기보다도 몇 배 긴 인생의 시간이 성인기의 삶일진데 생각하며 오랜 시간 찾아 헤매다 알게 되어 간 것이다. 굳이 독일의 캠프힐을 마다하고 영국 스코틀랜드의 캠프힐을 찾은 것은 인지학(人智學)이 시작된 독일이 아닌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운영되는 캠프힐을 객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스코틀랜드 에버딘 -바닷가를 끼고 있어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날아다닌다.



  필요한 책과 옷, 몇 가지를 챙겨 어렵사리 도착한 스코틀랜드의 에버딘... 시내를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내륙국가인 독일과 다른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6개월간 거주하게 될 Croft(작은 정원) 하우스의 안주인 격인 아스트리는 연착을 거듭해서 2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미국의 캠프힐에서 러시아 출신 건축가인 블라디미르를 만나 딸 자매를 낳고 이곳 캠프힐에 정착한 57세의 강인한 여성이다. 전형적인 영국의 안개 낀 오후, 나를 차에 태우고 가면서 앞으로 함께 살게 될 자신의 가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준다.

  해질 무렵, 작고 아담한 집에 도착하자 가족들이 낯선 이방인을 편안하게 맞았다. 독일에서 먼저 부친 소품들이 내가 살게 될 작은 방 안에서 낯선 땅의 어색함을 위로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전임자가 후임자를 위해 예쁘게 포장한 초콜릿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소리 없는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거겠다 싶어 마음이 훈훈해진다. 하늘이 보이는 유리창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스코틀랜드에서의 첫날밤이 지금도 생생하다.   

  


캠프힐의 하루     

  일곱 시에 기상하면 저마다 맡은 역할로 분주한 아침을 맞는다. 65세의 자폐인 도날드는 아침식사로 포리 죽을 만들고, 난청에 정신지체 장애를 갖고 있는 데비는 차를 끓이고 식탁 준비를 마친 후 함께 기도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식탁에서는 전날 저녁에 참가했던 댄싱그룹에서 자신과 함께 춤을 췄던 파트너의 매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을 준비할 예정인지, 이번 휴가는 어디로 갈 건지 같은 이야기들이 오간다. 식사를 마치면 정서장애로 동료들과 늘 어려움을 겪는 66세의 로지 아줌마가 설거지를 한다. 오랜동안 가정에서의 역할이 잘 분담되고 유지되어 온 듯 자연스러운 일상이 펼쳐진다. 

식사를 마치자 저마다 분주히 일터에 나갈 준비를 한다. 로지는 캠프힐 내의 카페테리아에서 손님 접대와 주방일을, 데비는 이웃집인 ‘백합 집’으로 청소를 하러 가고, 도날드는 농장일을 하러 간다. 청소도 단순히 내 집안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파출부 개념으로 다른 집에 가서 청소를 해준다. 물론 우리 집에도 다른 집의 장애인이 청소와 세탁물을 손질하러 온다.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코 워커는 청소를 하러 오는 장애인들을 지도해주며 함께 오전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대략 10시 30분 정도에 차를 한 잔씩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12시가 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와 코 워커(단기 자원봉사자)나 하우스 페어렌츠(안주인)가 준비해 놓은 점심을 함께 나눈다. 

점심식사 때는 다른 집의 식구들이나 캠프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한두 명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눈다. 생일파티 준비 얘기며 캠프힐 돌아가는 이야기, 이웃집 사람들 이야기, 문화 공연단의 방문 이야기 등등 공동체의 일상에서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나눈다. 누구도 대화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다.

식사를 마치면 다시 일터로 돌아가 3시 반쯤에는 오후 티타임을 갖는다. 캠프힐 내의 카페테리아에 모여서 차 한 잔씩 앞에 놓고 삼삼오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오후 5시까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매일 저녁 열리는 문화행사에 각자의 선택에 따라 참여하거나 친구를 방문하고 담소를 나누며 하루 일과를 마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성인 공동체 캠프힐에서의 일상은 이렇게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평화롭게 그들의 삶 속으로 잦아든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나이 든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이고 할머니 할아버지이다. 평화로운 하루의 일과가 막을 내린다. 도대체 캠프힐이라는 공동체의 평화로움을 어디에서 올까.     


인지학과 캠프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1861-1925)가 주창한 인지학(人智學)에서는 인간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존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정신적 존재로서,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고 사망 이후에도 존재한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눈에 보이는 신체와 영혼을 떠나서 하나의 정신적인 존재로 보는 견해를 갖고 있다. 장애는 불운이나 우연히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당사자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준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장애아동을 가르치고, 치료하는 사람들은 장애아동의 운명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새로운 운명(Karma)을 가져온다.”

캠프힐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출신 의사인 칼 퀴니히(Karl Koenig; 1902-1966)가 1940년에 영국의 스코틀랜드 에버딘이라는 지역에서 처음 시작한 장애인 공동체이다. 칼 퀘 니히는 유태인 의학도로서 슈타이너가 강의한 인지학을 바탕으로 한 의학과 정의 학생이었는데, 그의 의학사상에 심취하여 일찍이 의사로서 장애인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유태인으로서 2차 대전 말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정책을 피해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생의 두 갈래 기로에서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쫓기듯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그는 처음 에버딘 지역의 작은 집에서 장애아이들 6명과 함께 어렵게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독지가로부터 부지를 기증받아 오늘날의 거대한 공동체 마을을 이루게 된다.

캠프힐 공동체는 스코틀랜드의 에버딘 지역이 하나의 전형이 되어 영국 전역뿐 아니라, 인지학의 발생지인 독일로도 다시 전해지면서, 오늘날 전 세계에 100개 이상이 설립되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장애인 공동체의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장애인 공동체 캠프힐이 걸어온 길... 최초의 공동체와 루돌프 슈타이너 캠프힐 특수학교

  6명의 장애아동들과 함께 시작한 공동체는 점점 늘어나는 장애아동을 위한 교육시설이 필요해지면서 캠프힐 공동체 내에 캠프힐 슈타이너 자유학교(캠프힐 학교라고도 한다)를 세우게 된다. 이는 최초 발도르프 학교인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발도르프 아스트리아 공장에 세워진 학교보다 20년 뒤에 세워졌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1923년 장애인 관련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특수교육학 강의에서 장애를 보는 관점은 매우 독특하다. 장애를 일종의 ‘경향성(Tendency)'으로 파악하였다.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장애를 일종의 ‘균형을 잃은 저울’로 비유한다.

자폐증을 예로 들면, 이들은 ‘사회성’이 부족하고, 혹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필요한 것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거나 눈을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다시 말해서, 저울 양 쪽의 ‘사회성’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경향 Sociality)’과 ‘고독’(혼자 있으려는 경향, Solitude) 사이의 균형을 잃어버려서 ‘고독’의 무게가 ‘사회성’의 무게를 짓누르는 셈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다운증후군은 어떤가. 자폐증을 설명할 때 늘 함께 설명하는 것이 다운증후군이다. 서로 매우 대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운증후군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지나치다. 다운증후군 친구들은 사람들의 낯을 전혀 가리지 않아 학급의 꽃 같은 존재이다. 아무나 보면 달려가서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 품에 안겨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다면서 울기 시작한다.

특수교육이란,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장애인들이 안고 있는 이러한 불균형을 균형 잡아주는 ‘인간의 태도(human attitude)’라고 할 수 있다. 발도르프 특수교육에서는 치료교육의 일환으로 음악, 미술, 오이리트미, 말하기, 수공예, 승마, 마사지, 놀이치료 등을 아동들의 개별적인 어려움을 고려하여 제공한다.

이렇듯 캠프힐 공동체 내의 발도르프 특수학교는 커다랗게 치료, 교육, 공동체라는 요소를 갖고 있다. 간단하게 살펴보자면, 첫째는 치료 분야이다. 학교 내의 전문의와 교사, 협력자, 치료사들이 함께 한 모임에서, 장애아동의 치료를 결정한다. 말하기, 승마치료, 미술치료, 음악치료, 놀이치료, 치료 오이리트미 같은 것들이 있다. 둘째는 교육 분야이다. 발도르프 교육과정에 따라(발도르프 특수학교에는 특별한 특수교육과정이 존재하지 않고 일반 발도르프학교의 교육과정을 따른다), 연령에 따라 학급에 속해 교육을 받으며, 고등부가 되면 작업장에서 목공예, 금속공예, 도자기 공예, 직물 짜기 같은 직업교육을 받는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경우 인근의 업체에 취직을 하기도 한다. 셋째는 공동체적인 삶의 형태이다. 모든 아동들은 학교 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부모가 아동을 돌볼 능력이 없거나, 양부모도 없는 경우에는 학교 내에 가정에서 협력자(Co-worker)와 함께 가족공동체에서 살게 된다. 캠프힐 가정공동체는 흔히 생각하는 피로 연결된 가족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이들은 정신(spirit)으로 연결된 가족이 되는 셈이다. 장애아동은 가정공동체에서 협력자들과 더불어 살면서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협력자들은 가정공동체에서 장애아동의 형제, 자매 역할은 물론 부모 역할도 하는 셈이다. 내가 머물렀던 가정의 아스트리 남편이자 건축가인 블라디미르는 세계 각국에서 캠프힐 운동이 시작되면 그곳에 건축설계를 해주거나 철학적 조언을 해주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그를 우리 가족 모두 따랐다.     


성인 공동체 베나 허와 뉴튼 디     

  캠프힐 성인 공동체는 아동 공동체와는 차이가 있지만 기저에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이 일상의 삶 속에서 잘 실현하도록 돕는 데 있다는 것에는 특별히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성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는 철학은 무엇보다도 슈타이너의 삼중 사회질서 이론이다. 프랑스혁명의 가치를 표방한 자유, 평등, 박애(형제애)에 기초한 것으로, 자유-문화생활에서의 정신적 자유, 평등-법 생활에서의 민주적 평등, 박애-경제생활에서의 사회적 형제애를 말한다. 

자유란 창조적인 정신생활을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 개인의 내적 원천을 개발해 낼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캠프힐 성인 공동체는 이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공동체와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문화생활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단순한 참여가 아닌 적극적인 문화창조의 주체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캠프힐에서는 축제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준비한 연극을 정기적으로 공연하여 인근 지역의 관객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평등-법 생활에서의 민주적 평등이야말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제한될 수 없는 항목이다. 공동체 내의 장애인과 함께 사는 비장애인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올바로 실현할 수 있도록 모든 결정의 주체로 함께 한다. 언젠가 하우스 마더인 아스트리는 공동체 전체 회의를 마치고 오면서 내게 불만을 표시했다. 왜 장애인들(공동체 내에서는 빌리져라고 부른다)들은 그들의 권리에 소극적이냐고. 아마도 스스로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며 격앙되게 하소연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장애인을 제한적 장애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권리와 의무를 질 수 있는 ‘동등한 주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같이 함께하는 사람들이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평등생활의 토대가 되고 공동체적 삶에 녹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나누었던 이야기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경제생활에서의 박애정신은 그야말로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일 것이다. 캠프힐 공동체는 늘 풍요롭다. 물론 복지가 잘 실현된 조건도 있겠지만, 작은 것을 아끼고 함께 나누는 삶이 더 큰 풍요로 이끄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주정부의 사회복지국에서는 캠프힐 운영을 신뢰하여 예산의 많은 부분을 우선 지원한다. 내핍에 익숙한 일부 캠프힐 운영자들은 너무 많은 돈을 주어 쓸데없이 사람들이 낭비하게 한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하지만 캠프힐 방문자가 느끼는 풍요는 무엇보다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나눔의 삶 속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뉴튼 디(Newton Dee) 성인 캠프힐 지역의 뒤편으로 흐르는 강 건너에는 베나허(Beannachar Camphill Community)라는 청장년을 위한 캠프힐 공동체가 있다. 단과대학 개념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30세 이전까지의 청장년 장애인을 위한 공동체이다. 성인 공동체로 옮겨가기 전에 머무는 곳인 베나 허는 주로 허브농장을 중심으로 청년 장애인만 17세부터 30세까지 연령층이 생활하고 있다. 고성을 개조한 건물로 다른 곳보다 더 아름다운 환경이다. 청장년 장애인들은 이곳에서 열심히 직업교육과 캠프힐의 생활을 익히며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걸어서 십 분 거리에는 캠프힐 공동체에서 평생을 산 공동체 관리자들이 늙어서 쉴 수 있는 시미온(Simeon)이라는 요양원 비슷한 공동체도 있다.(그러니까 에버딘 지역 주위에만 6개의 캠프힐 공동체가 있는 셈이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동력을 나누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젊어서 인생 경험을 쌓고자 왔다가 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어느 공동체 가정의 경우는 대를 이어 가정관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적과 문화는 다르지만 저마다 캠프힐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삶을 자신의 일생에서 최선의 선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캠프힐 운동을 꿈꾸며     

  캠프힐에 머문 6개월 동안 한국의 옛 동료들, 장애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들이 방학을 맞아 방문도 하고 서신도 주고받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캠프힐에서 지내면서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한 가지 화두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비장애인들은 과연 행복한가? 장애인들과 인연을 맺고 일하는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인생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고 있을까? 

이곳의 코 워커(Co-worker)나, 부모(Hausparents; 혈연이 아닌 정신으로 맺어진 부모)는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적인 삶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과연 그들의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할까? 이곳은 인간의 조건과 삶의 조건을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삶터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비장애인으로서 공동체에서 함께 사는 사람이 자신의 가난한 삶에 만족하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여유 있게 살고, 장애인들도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으면 어느 한쪽의 일방적 희생이 될 것이고, 그 결과는 공동체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국하여 2년 가까이 이 땅에 캠프힐 같은 공동체를 만들고자 동분서주하며 지냈다. 5년 전보다 몇 배 오른 부동산 가격, 그럴 줄 알았다면 집을 팔아서 땅이라도 사놓고 떠났어야 했는데... 깊은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란 참 맛이 없을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피어난 동토의 꽃들이 아름답듯이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듯 굽이진 사연을 안고 2009년 2월에 양평슈타이너학교를 시작하고 첫번째 고등학교 졸업생 3명이 탄생되던 해에 양평 신복리의 절터를 매입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캠프힐에서 온 편지'의 후속 편으로 이어진다.

캠프힐코리아를 상징하는 첫번째 집 '캠프힐 도토리하우스'

                                                            함께하는 바베큐 파티


슈타이너는 1923년 장애인 관련 종사자들을 위한 특수교육과정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내적인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첫 번째 전제조건이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지 않으면, 죽음과 다음의 출생 사이에 신들이 하는 바로 그 일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을 명상하면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명상하면서 장애인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루돌프 슈타이너, 특수교육학 강좌; 1924, Heilpaedagogischer Kurs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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