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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눗 Jun 27. 2019

날씨와 기분의 상관 관계

런던, 벨기에, 싱가포르 날씨와 비 이야기.


들리는 소문으로만 런던을 접할 땐 내 머릿 속 그 곳은 매일같이 비가 오고 눅눅하며 축축한 도시였다. 우중충한 구름이 하늘을 온통 가려서 마음까지도 우울해져버릴수도 있다는 반 협박의 소식을 자주 접했었다. 그렇게 두려움을 안고 도착한 그곳은 끝장 나게 맑은 하늘이 2주 연속으로 떠 있던 4월의 중순이었다. 마침 런던에 머물고 있었던 친한 동생이 '이게 왠일'이냐며, 엊그제까지만해도 몇 달간 세상 어둡던 겨울 날씨였는데 봄이 되었다고 좋아했다. 


찬란한 햇살이 온 도시를 밝히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멋있었다. 아무런 검색없이 무작정 걸어다니던 길들마저 오래된 영국식 건물들덕에 다 영화촬영지 같았다. 이렇게 멋드러지는 건물들이 사방천지에 널려있는데 다들 별 감흥없이 걸어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걷는 걸음마다 사진을 찍어대는 통에 하루에 많은 곳을 갈 수가 없었다. 한 장소만 가도 내겐 성공한 셈이었다. 



추적추적해질 낌새를 보이는 런던 킹스크로스



작년 2년 정도 머물면서 운좋게도 그다지 어두운 날씨의 영국은 기억에 잘 남아있지 않다. 문득 슈퍼마켓을 갈 때 비가 추적추적 왔다거나 기분이 딱 별로인 날에 하늘을 봤는데 온통 먹구름이 껴서 낮인지 저녁인지 분간이 안간다거나 할 때가 손에 꼽힐 정도로 어두운 런던을 기억하질 못한다. 그건 내가 있던 2년 간 실제 날씨가 하필 좋았다기 보다 내 마음 상태가 햇살로 가득 찼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 있던 어느 언니의 경우 영국의 날씨가 너무 우울해 힘들다며 토로한 적이 잦았던 걸 보면 정말 날씨는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다.) 



비오기 직전의 런던 테이트 브리튼 근처



그래도 영국인들의 일상 대화인 그 날씨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변덕스럽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분명 아침에는 구름 한점 없이 '파랑색' 하늘이었는데 갑자기 점심 때가 되서 비가 오다가 퇴근 때는 다시 깨끗하게 맑다거나 하는거다. 런던의 비는 하늘에 물기둥이 터진듯 직선으로 내리쏟아지는 한국의 여름비같지 않다. 말그대로 '추적추적' 와서 우산을 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비란 거다. 마침 바람까지 불어대니 스프레이처럼 흩어지는 빗방울들은 우산을 펼쳐 막을 수 없을 때도 잦았다. 그럴 땐 그냥 맞는 게 속편하다. 열 발걸음마다 뒤집히는 우산을 바로 잡느라 안간 고생할 바에는 빨리 달려서 목적지까지 가는 게 좋다. 


그렇다고 조금 굵은 비가 우두두 쏟아지는대도 우산을 쓰지말라는 말은 아니다. 자칫 영국신사 분위기를 내고싶어서 우산없이 걸었다가 물에 빠진 생쥐꼴되기 쉽상이니, 너무 많은 비가 올 때는 어느 한적한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 편이 좋을 거다. 어느 정도 커피잔의 끝이 보일 정도가 되면 비가 그쳐있을테니. 



흐리다가 갑자기 해가 쨍하게 비치는 장면. 아주 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가 왜 영국에만 해당되는 것처럼 소문이 나있는지 참 의문이다. 그 소문덕에 영국빼곤 다 화창한 줄 알았더니 벨기에도 영국과 똑같기 짝이 없었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벨기에 로컬인 남자친구는 집 앞 산책이라도 가려 하면, 십 분단위로 구름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수시로 날씨를 확인했다. 아무리 현재 해가 쨍쩅하게 떠있어도 1시간 뒤쯤 비구름이 몰려온다는 레이더 망이 보이면 반드시 우산을 챙겨갔고, 그의 예상은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아, 그의 예상이 아니라 기상청의 예보.) 하여튼 벨기에의 여름은 한 주 내내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또 왔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는 날들이 꽤 많았다. 



내가 사랑하는 벨기에. 화창해보이던 이 날 비가 2번 왔었다.



물론 이상 기온으로 한국과 일본이 40도 안팎까지 올라갔던 작년 여름엔(그 때 한국과 일본을 여행했었다. 더워 죽는 줄...) 벨기에도 한 달 내내 비가 없이 매우 건조하기만 했던 때도 있었다. 그 때 가장 큰 차이는 습도였는데, 하도 건조해서 더운지 아닌지 잘 몰라 열사병에 걸렸던 벨기에와 달리, 여행으로 방문했던 일본은 도착하자마자 공중목욕탕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마치 땀도 안흘렸는데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여행 중에 미친듯이 많이 흘렸다.) 


그리고 싱가포르로 옮겨오고 나서 느낀 점은 놀랍게도 이 곳 또한 상당히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거다. 가기 전엔 이 곳이 1년 내내 여름이라는 것 빼곤 아무런 날씨 정보가 없었다. 그렇게 도착했던 2월은 솜사탕 구름을 한-껏 자랑하며 사이즈도 상당한 열대 나무들 속에서 여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런던의 추위를 벗어버린 게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이 곳이 한국처럼 자주 해가 뜬 날씨를 가진 여름 국가인줄 알았던 거다. 큰 오산이었다. 



오전에 비가 온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갠 싱가포르 (아무 보정없이 샤오미 폰으로 찍은  사진!)



어느 날 밤, 새벽 세 시쯤부터 시작된 천둥과 번개는 우르르 쾅쾅 우지끈 번쩍 번쩍하며 세상 종말의 때를 보여주었다. 예수님 오시는 줄 알았다. 커튼을 다 걷어내면 저-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방에서 머물렀기에 나는 새벽에 정말 커튼을 다 열어젖히고 번개를 구경했다. 구름 사이에서 뻗어나온 전기충격라인이 땅까지 내리꽂으며 사라지기를 사방에서 반복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전쟁을 방불케하는 천둥 소리가 빌딩마저 흔들린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무서웠다. 그런 날씨가 일반이라는 걸 모르고 서른 넘은 나는 너무 무서워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한참을 무서워하다 하도 그칠 줄 모르니 결국 저 번개가 피카츄의 전기파워만큼 강한 걸까하며 정신 나간 생각을 하다 잠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알게 된 건 이 곳이 한 달의 절반이 조금 안되는 날수만큼 비가 온다는 거였다. 6월이 되고 비가 더 많이 오는 듯 하길래 지금이 우기인가 싶어 검색해보니 11월에서 2월까지가 우기란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가 더 온다는 걸까. 


런던에 비하면 싱가포르는 빗방울이 더욱 굵은 것 같다. 아직은 겨우 2달 째 머무는 거라 명확히 정의는 못 내리겠지만, 여튼 비가 많이 온다. 덕분에 쏴아 내리는 굵은 빗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들리는 빗소리는 꽤나 감상적이고 아름답다. 게다가 쨍-하고 해뜨는 그 날을 더욱 기다리게 하면서 산책이라도 걷게 만드니 일석 이조다. 



저녁 노을을 보며 걸었던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



날씨는 그 날 하루의 기분을 좌우기도하고 여행자들의 추억을 더 빛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날씨를 재평가 할때가 더 많다. 구름이 온 하늘을 덮어서 해 한 점 못보는 날이라 우울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울적하니까 날씨탓을 하게 되는 거다. 비가 와서 왠지 쓸쓸하고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나를 돌아보고 위로해줘야할 때다. 비가 와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슬프니 빗물이 눈물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내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좀 듣고, 고생했다며 앞으로는 이렇게 한 번 해보자고 기운을 복돋워주는 김에 뜨끈하게 김이 오르는 파전과 친구와의 수다로 양념을 쳐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오늘 아침에 비가 많이 와서 모처럼 파전을 만들어보려다가 저녁되니 해가 쨍쩅하고 노을까지 졌다. 비가 온 후라 저녁에는 바람마저 불었고 보타닉 가든을 홀로 산책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파전은 뒤로하고 열대 나무들이 말그대로 '우거져' 있는 그 곳을 잠깐 걸었다. 오늘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자연을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 수치가 떨어진다더니 정말 연구결과는 무시할 수 없나보다. 시원한 바람에 푸른 나무 향기가 물씬나는 초록빛 자연을 보니 30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느리게 사는 삶. 속도가 느린 게 아니라 천천히 날씨탓만 했던 나를 돌보며 토닥여주며 천천히 걸어가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는 정말 필요하다. 





세 국가의 날씨는 다르지만 그 날씨들을 대하는 내 태도는 늘 동일하다. 변화무쌍한 날씨들마저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 마음의 태도 말이다. 3년 전 여름까지만해도 해뜬 날 마저 비참했던 내 마음이 정말 많이 진화해왔다. 그렇게 느린 삶은 나를 천천히 바꿔오고 있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속삭이듯이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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