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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눗 Mar 04. 2020

우리 매니저가 변했어요. 1탄

[싱가폴 디자이너 일상] 날카로운 그의 지적질이 나에게 가르쳐 준 건

"내가 말했지, 네 디자인 지금 내 눈으로 다 보고 있으니까 그걸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디자인을 설명하지 말고, 그 뒤에 숨겨진 이유를 설명하라고. 다시 해봐." 


직속 상사의 스파르타식 발표 연습을 1시간 내내 시달리면서, 난 30년이 넘는 생을 살아오는 동안 온몸을 던져 자신을 발전시켜보겠다고 발버둥 쳐본 적이 전혀 없었음을 깨달았다.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했던 나인데, 그게 사실 '열심히 했다'보다는 '하긴 했다'라고 말해야하는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된거다.


"아니, 내가 말했지 여기에서 XXXX는 반드시 언급해야한다고. 내가 말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흐눗. 그러니까 여기에는 구지 너가 그걸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고, XXXX를 알려주는 게 중요해." 


그의 지독하고 날카로운 지적질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말에도 모순이 있는데 나만 맹렬하게 다그치니 억울했다. 표정에서 '지쳤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흐눗, 포기하지마! 다시 해봐. 나 이렇게 우리 팀 헤드랑도 연습했었어. 계속 반복하면서 정확하게 준비가 되는거야."


정말 나를 발전시키고 싶은 건지, 내가 큰 미팅에서 어벙한 설명으로 중요한 디자인 파트를 말아먹을 것을 예상해서 걱정되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진짜 계속 다그치듯이 쏟아지는 그의 표현들이 내 정신을 갉아 먹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그의 브레인과 미친듯이 좋은 그의 프리젠테이션 스킬 덕분에 나는 도중에 폭발하지 않고, '배우고 있다, 배우고 있다' 하며 혼자 최면을 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완벽했어. 다시 해봐. 이 부분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 하고, 여기 와서는 저렇고 이렇다는 걸 말하는 거지. 뒷 부분은 너가 말했던 그대로 말하면 돼. 아주 좋았어." 


솔직히 터놓자면 그의 강도높은 발표 훈련이 힘들었던 게 아니다. 최근 들어 나를 대하는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추측하건데 나에 대한 신뢰가 땅으로 떨어졌고, 내 어떤 점들에 대해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럴 만도 했다. 6개월이 지나는 동안 그가 기대했던 리더급의 역할은 커녕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내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제대로 명쾌히 풀어내지를 못했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그가 처음부터 날 그렇게 대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최근 한두달 가량 동안 아주 점진적으로 달라졌다. 


회사의 방침을 따라 그는 종종 피드백을 줄줄 써서 일대일 미팅을 통해 설명을 해주곤 했는데, 이번 피드백은 장난 없었다. 그는 정말 신랄하고 정확하게 나를 파악했다. 그리고 단점에는 블렛 포인트가 4개나 되었다.


한 번은 내가 그의 포인트를 못알아 듣고 계속해서 반박만 하자, 그가 미친 듯이 열받아서 "너 나랑 네 PM이 계속해서 말했잖아. 거기서 그만 끝내고 빠져나와야 한다고. 그런데 너는 절대 안들어. 니가 이렇게 하는 거 진짜 나를 열받게 해." 라고 하는 말에 대충격을 받았었다. 밉다기 보다는 마음이 진짜 아팠다. 이 사람은 이제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이후로도 여러 번 내 말을 중간에 자르면서 피드백을 줄 때 한 말이 바로 이걸 말하는 거라며 혼쭐을 내길래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물론 한국에서 경험했던 것 처럼 이유없는 인격 모독이라던가 '그냥 너 시름'의 근거 없는 안티형 괴롭힘은 전혀 아니었기에 견딜만 했다. 그 빼고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평균 이상으로 너무 잘해줘서 그저 '감사합니다'하며 회사는 계속 다녀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나의 약점을 강점으로 생각하며 지독하고 고집스럽게 그것을 지키고 있었다. 타인이 주는 특정 피드백 -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들은 체도 안하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나를 발견했다. 충격적이었다. 내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철저히 믿고 있었고, 그런 면에서 누가 뭐라고 하면 '나를 받아들이라'는 식의 철학으로 고쳐먹질 않았던 거다.  



Photo by Helloquence on Unsplash


바로 그 주에 남자친구가 아침에 카톡으로 내 꿈을 꿨다며 장난식으로 (웃기려고) 설명하면서 한숨쉬는 다람쥐 아이콘을 같이 보냈다. "나 어제 꿈을 꿨는데, 너가 세탁세제를 막 마시고 있었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막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너가 계속 마셨어." 아이러니하게도 이 꿈이 내 뒷통수를 강력하게 후려쳤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 약점이 진짜 남에게 고통-짜증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세상 처음 깨달았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진짜 욕을 퍼부어줘도 시원치 않았을텐데 다들 참 잘 참아주었구나 하는 마음에 드디어 미안해졌다.


타인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법이다. 평생 내 얼굴이나 몸뚱아리를  오롯이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거울과 카메라 렌즈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라야만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서 그 당시 상황에서 느끼는 내 감정에만 포커스를 둘 게 아니라, 나에 대해 반응하는 어떤 소리들에도 잘 집중할 줄 알아야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매니저의 소리들은 날이 서있어 비수같이 내 마음에 훅훅 꽂혀 통증을 유발하기는 했지만, 그제서야 돌덩이같이 고집스러운 나를 보게 된 것이니 꽤나 가치있는 아픔이었다. 


이제 내가 처리할 숙제는 이러한 똥고집을 곱게 싸매어 잘 집어던지고 말랑말랑한 귓구멍으로 타인의 악악거리는 소리라던가 미세한 중얼거림들을 잘 수용하는 거다. 그리고 가장 큰 산은 아무래도 매니저의 지속되는 거침없는 발언들때문에 그와 대화하는 동안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벌렁거리고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어버버거리는 걸 해결하는 것이다. 이건 결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고 하는 즉슨, 결국 그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생각만해도 벌벌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일은 곧 벌어지고 말았다.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투비컨티뉴 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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