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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전망이 아무리 좋아봤자

by 랩기표 labky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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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E.M. 포스터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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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티를 갓 벗은 루시는 어느 런던 한적한 마을에 살며 낭만적인 슈만보다는 격렬한 베토벤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느 여자와는 달리 남동생과 테니스를 치며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을 즐겼다. 어릴 적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숲 속 작은 호수에서 남동생과 홀딱 벗은 채로 수영을 즐겼던 선머슴 같던 아이였다. 엄마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호되게 꾸중을 들은 뒤에서야 멈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이 깊은 숲 속을 걸을 때마다 에덴동산과 같은 달콤한 판타지가 일어나며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촌언니와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난다. 세상 끝을 여행하고 싶은 그녀였기에 비록 사촌 언니와 동행하긴 했지만, 부모 곁을 떠나 처음 가게 된 여행이라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런 설렘을 안고 호텔방을 들어간 루시는 그 전망을 보고 실망을 한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창 밖 풍경을 기대했던 루시는 온통 붉은색 지붕만 보이는 것에 짜증이 났다. 사촌언니는 그런 동생을 달래고 달래서 겨우 호텔에 마련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 그곳에서 루시는 운명적인 사랑인 조지를 만난다.




조지는 말이 없었다. 반면에 그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건너편 여성에게 레몬 에이드는 위에 좋지 않으니 먹지 말라는 둥 대부분은 쓸데없이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철강회사에 다니는 아들의 묵묵부답한 모습이 정신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곳에 온 것이었다.

조지 부자(父子)는 루시가 전망 나쁜 방에 대해서 투덜대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남의 내장기관까지 걱정하는 신사답게 아버지는 그녀들에게 자신들의 전망 좋은 방과 바꾸자고 한다. 물론, 유럽 귀족 신분의 루시와 사촌언니는 낯선 이들의 호의를 거절하지만 아버지는 미국인답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개척정신으로 방을 기여코 바꾼다.

이것이 루시와 조지의 첫 만남이다.

둘은 여행 중 뜻밖의 살인 장면을 함께 목격하면서 더욱 가까워진다. 이후 조지는 루시의 엉뚱하고 다른 여인들처럼 체면을 차리지 않는 모습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조지의 감정의 변화 또한 과묵하여 쉽게 눈치채기는 어려웠다.

조지는 사랑도 묵묵부답형으로 했다.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랑에 대해 확신했다. 조지 부자와 루시 일행 등이 함께 호텔 근교로 소풍을 갔을 때, 조지는 루시와 단 둘이 있게 되자 거침없이 키스를 한다. 루시는 놀랬지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여행을 책임지고 있던 사촌 언니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서둘러 집으로 떠난다.

그렇게 둘은 기약 없이 헤어진다.

이후 루시는 결혼 적령기가 되면서 당시의 관습대로 배경이 든든한 귀족과 약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는 약혼자를 사랑하는 의무에 최선을 다한다. 몇 겹의 옷을 겹쳐 입을 듯한 불편한 생활이 이어지지만 루시를 비롯한 가족들은 통상적인 관례인양 참아낸다.

하지만, 이후 조지 아버지는

루시가 사는 동네로 우연히 이사를 가게 되고
그 둘은 운명적으로 묶이게 된다.

루시의 담임목사는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된 조지에게 둘은 운명이라는 듯이 말한다. 루시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을 보아온 담임목사는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루시와 조지, 둘을 피렌체 여행에서 우연히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목사는 조지가 이곳에 우연히 온 게 된 것을 두고 이것은 새로운 운명적 만남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사의 예감은 적중했다.

루시는 조지를 외면하려고 할수록 더욱 끌렸다. 결국, 루시는 이 약혼으로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조지가 몰래 그녀에게 키스를 한 후 사랑한다는 고백을 통해 현실로 다가온다. 조지는 루시가 자신과 맞지 않는 결혼으로 삶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약혼에 대해 긍정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은 결코 물러설 수 없다고 한다.

루시는 베토벤의 운명 연주곡 같은 강한 울림을 이어받아 파혼을 선고한다. 그녀의 약혼자 세실이 그 통보를 받고 감정을 숨긴 채 순순히 받아들이며 애처롭게 구두를 신는 장면은 어딘가 불편하지만, 가슴 찡한 구석도 있었다.



루시의 파혼 후, 따스한 햇살과 향이 좋은 차와 같은 시간이 그 둘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둘은 전망 좋은 방을 얻어 처음 만났던 피렌체로 간다. 우습게도 그곳에서 어떤 여인이 둘의 첫 만남처럼 방의 전망을 두고 투덜댄다.

장면이 바뀌고
둘은 전망 나쁜 방 창가에 앉아 키스를 하고

서로를 바라본다.


그 둘을 비춘 화면은 이보다 더 좋은 전망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전망이 좋고 나쁨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은 아름다워진다.

내가 나다워지는 순간,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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