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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by 랩기표 labkypy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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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도 잇신(2004)





조제

다리를 쓰지 못하는 그녀는 매일 곁에 두고 읽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따와 스스로를 조제라 불렀다. 그녀는 밖으로 몸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세상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쓸데없는 호기심과 헛된 희망은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녀를 수레에 담고 이불로 덮은 뒤 사람이 적은 시간대에 간간히 산책을 나가는 것만이 그녀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할머니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손녀를 위해 교과서부터 소설책까지 버려진 책들을 집안으로 들였다.(아마도 폐지를 줍다가 벌어진 일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닥치는 대로 그 책들을 읽었다. 부족한 세상은 책으로 겨우 채워졌다. 그렇게 손녀는 책을 읽고 할머니는 낮잠을 자며 할 일 없이 두 가족은 집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허름하고 낡은 집만큼이나 불안하고 안타까웠다. 그 생활에 아무렇지 않게 익숙해진 모습은 더 처연했다. 아픔이 차곡차곡 쌓인 일상이 조제에게 주어진 특별한 삶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준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츠네오를 만난다.



호랑이

대학생 츠네오는 우연히 조제를 태운 수레가 내리막길에서 어떠한 보호도 없이 곧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자신의 앞으로 쏟아지는 것을 마주한다. 할머니는 수레 안의 손녀가 걱정되어 울부짖고 츠네오는 가까스로 멈춰 세운 수레에 덮인 담요를 걷는다. 그것이 조제와 츠네오, 둘의 첫 만남이다. 이후 츠네오는 조제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 밥을 지어먹고 산책도 하면서 둘은 묘한 관계로 맺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일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다”는 조제는 츠네오와 동물원에 간다. 이빨을 드러내며 앞다리를 들어 올리는 호랑이를 보면서 몸을 떤다. 무섭다며 소리치는 조제의 모습은 두렵다기보다는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기쁨의 표현으로 보였다. 츠네오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미모와 따스함 그리고 조숙한 멋은 불편한 몸 안에서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츠네오와 조제, 조제와 츠네오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라는 것에 큰 행복을 느꼈다. 이토록 불편한 연애가 더욱 절실한 욕구로 이어져 둘은 몸과 마음을 수시로 탐했다. 조제는 꿈만 같던 삶을 얻었고, 츠네오는 꿈만 같던 그녀의 소망을 현실로 만들며 만족했다.






물고기

둘의 사랑은 결국 깨어진다. 조제의 불편한 몸 때문에 촉발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여느 다른 연인들과 다들 바 없이 두 사람의 세상에 새파란 봄과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쓸쓸한 가을을 찾아왔으며 곧 차가운 겨울이 오자 아주 담담하게 이별한다. 그 이별의 모습은 누군가의 비참함이나 애절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서로에게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없었다. 이별 선물로 추억이 담긴 야한 잡지를 건네며 잘 지내라는 인사하는 조제의 모습처럼 적당히 가볍고 씁쓸했다. 하지만 조제를 뒤로 두고 나온 츠네오가 오열했던 것은 어쩌면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동안 잠자리를 같이 했던 여자들과의 대수롭지 않은 재회를 이번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보편적이었기에 더욱 특별했다.

조제는 츠네오 덕분에 생애 첫 바다를 본 후 자신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다. 어느 깊은 바닷속 소리가 없는 어둠 속에서 자란 물고기. 깊은 바닷속 자유로웠던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와 잠시 불편하게 살다가 죽더라도 그대를 만났기에 후회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조개껍데기처럼 이리저리 데굴데굴 하찮게 굴러다녀도 상관없다고 한다. 마치 인어공주처럼 진정한 사랑을 했기에 거품처럼 사라져 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심한 츠네오가 깊은 잠에 들 때 그녀는 그렇게 자신은 물고기였다고 조용히 읊조린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당신이 어떤 삶을 살던지 결국 사랑만이 당신을 치유할 것이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었는 것 같았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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