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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네마 천국

나를 성장하게 하는 것

by 랩기표 labkypy

시네마 천국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추억. 그림처럼 아련하게 펼쳐지는 생각들이 가슴에 와 닿아 뭉클한 성격을 가질 때 쓸 수 있는 단어. 버거운 현실 속에 가끔 이 추억이란 것들이 다가와 위로와 용기를 주고 간다. 그렇다. 위로와 용기다. 지금 우리에게 아주 절실한 바로 그것들이다.

불만족은 인간의 숙명이다. 정제되지 않은 불만족은 과욕을 부른다. 과욕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세상은 규칙이 정해져 있고, 과욕이 그 규칙을 깨는 영역까지 닿게 되면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인간은 과욕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리석다. 그래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시대는 이러한 불만족과 욕구를 잘 다루는 자를 리더로 내세우기도 하고 성공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도 한다.

우리가 비록 만족을 모르는 종족이라고 할지라도 작은 것에 만족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만족과 불만족이라는 경계선이 아닌 곳에서 호기심이 가득할 때였다. 그때의 기억들은 각자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숙성의 시간을 거쳐 다양하게 재해석되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상처 입은 우리에게 약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거창할 필요가 없다는 작은 안도와 함께 말이다.





영화는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의 어릴 적 추억을 그린다. 이탈리아 어느 작은 마을에 살았던 꼬마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사기에서 쏘아져 나오는 빛이 어둠을 뚫고 스크린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흑백 영상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들어가 소년을 흥분시켰다. 꼬마가 살았던 작은 바닷가 마을에는 영화관이 없었다. 대신에 목사는 자신의 교회를 영화관으로 만들어 돈벌이를 했다. 교회라는 특성상 키스신은 목사의 사전 검열로 잘려나갔고, 영사기를 돌리는 아저씨는 잘린 필름들을 모아두었다. 꼬마는 영사기가 촤르르 돌아가는 작은 공간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꼬마는 영사기에 불이 붙는 사고로 눈을 잃은 아저씨를 대신해 영사기를 돌린다. 꼬마가 청년이 되자 아저씨는 자신과 달리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도록 그를 종용했고, 결국 영사기를 돌리던 청년은 도시에서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

아무 이유 없이 좋은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마니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만들어진 욕구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들과 다른 것을 추구할 권리는 구속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지우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헌신은 그 사람을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만들 것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성공이란, 세상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성취하는 데 있다. 성공한 사람은 이유 없이 좋은 것들을 구체화하고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즐기는 사람이다. 보통의 그들은 결과로써 성공이 아니라 과정으로써의 성공을 즐긴다. 호기심과 탐구, 성장 과정을 즐기는 자들이다. 이러한 신념과 끈기가 어느 날 사회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줄 때, 비웃던 자들은 부러움의 시선을 보낸다.

주인공 영화 감독은 이처럼 꿈을 이룬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슬럼프는 찾아왔다. 잠 못 드는 바쁜 일상. 사랑 없는 결혼 등으로 삶의 이유를 잃어갔다. 창작에 익숙해지고 사람들의 환호도 계속되었지만 자신의 삶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거두지 못한다.

바로 그때, 추억이 찾아왔다.

영사기를 돌리던 아저씨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는 일종의 치유를 받았다. 자신의 삶에서 영화는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아저씨가 그를 위해 유품으로 남긴 잘린 키스신이 담긴 영상을 보면서 주인공은

드디어 웃는다.




인생이란 영화는 어쩌면 꼭 필요한 장면을 빼놓고 상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 남아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언제 어떻게 내게 찾아올지 모른다. 그 필름들을 스스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내 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영화를 하는 이유와 웃음을 되찾은 주인공 토토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장면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장면들이 다시 상영될 때, 나는 다시 내가 바라던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를 추모하며,
훌륭한 영화와 음악에 감사할 따름이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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