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죽지 못하는 운명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아신전

by 랩기표 labkypy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 김영하




아신의 일기




우리 부족은 천대받는 신세였지만 나는 그 출처를 알지 못했다. 태생으로 정해진 것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묻기를 그만두고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먹고사는 데만 부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버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의 사치라고 했다. 아버지는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와서 이곳에 터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조선의 왕을 위해서 대를 이어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어린 나의 눈에는 그것은 사실 구걸에 가까워 보였다.


이런 삶이 행복하지 않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행복은 그 글자 안에만 갇혀 있었다. 나는 글자 안에 갇힌 행복을 어떻게 해서든 꺼내고 싶었다. 부족했지만, 넉넉한 기분으로 애써 웃으면 불행은 달아나고 그 자리에 행복이 들어앉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향 사람들과 조선인들은 싸우기 시작했다. 조선은 적의 피가 흐르는 아군으로써 우리를 어떻게 이용할까 궁리만 했다. 아버지는 이미 한쪽 눈을 감았다. 언제나 행복한 결말만을 이야기했다. 불행은 이렇게 감긴 눈을 통해 순조롭게 들어왔다.


결국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부족은 조선의 쓰임에 버려졌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저 아버지와 가족들은 여진족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만 알았다. 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벌어진 비극은 죄의식이 됐다. 그리고 이 죗값은 여진족들을 죽이는 것으로만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 매달린 가족의 그림자가 항상 나의 뒤를 따라다녔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산속에서 활을 쏘고 칼을 단련시켰다. 나는 강해지는 법 외에 달리 목숨을 이어갈 방도를 찾지 못했다. 복수의 시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가족들의 죽음 이면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진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은 여진족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부족을 이용했다. 조선의 산에서 누군가로부터 떼죽음을 당한 여진족의 사건은 조선의 간계로 우리 부족의 일이 되었다. 동족을 배신한 철천지원수가 된 우리는 여진족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이 모든 사실이 적혀 있는 문서를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라 가벼이 여겼다. 그들은 우리에게 작은 성의를 베풀고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대를 이어 몸과 맘을 바쳐 충성하기를 바랐다. 이 삶에 익숙해진 아버지는 관직을 받아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을 품고 아버지의 아버지의 뜻에 따랐지만, 나는 달랐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다. 내게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복수였다. 조선이 우리 목숨을 명분으로 팔고, 여진족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성립된 평화는 깨어져야 마땅했다. 우리의 피로써 시작된 이 거짓은 그들의 피로써 씻겨 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복수를 위해 죽은 자를 살려내는 꽃을 이용했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던 벽화의 의미는 내게 무언의 암시를 주는 것 같았다.


피의 서막은 그렇게 시작됐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품었던 욕망 때문에 인간으로서 죽지 못하고 인간이 아닌 것들로써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비린내 나는 광경을 높은 곳에 올라서서 바라볼 것이다.


나는 이미 그때 죽었다. 갈 곳 잃은 영혼은 그 위를 떠돌아다닐 것이다.



©️sc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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