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좋아한다. 힘들 때마다 읽는 책이다. 공허한 마음에 무엇이라도 채워 넣고 싶을 때, 오히려 더 비워낼 수 있어 가득 차는 책이다. 그래서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처럼 살아가려 노력했고, 그것만으로도 삶은 어떤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 주 내용은 특정 생각에 집착하지 말고 변화에 적응하라는 것으로도 집약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상 중 하나가 제물론에 나오는 ‘오상아’이다. 자신을 장례를 지낸다, 즉, 자신을 죽인다는 의미이다. 자아를 없애는 행위이다. 나를 무엇이라고 정해두면 그 외 것들과는 경계가 생기고 그러므로 인해서 다툼이 생긴다.
이분법적인 사고, 틀에 갇힌 사고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을 뿐, 시대의 흐름과 그에 맞는 지혜를 찾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지식은 특정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일 뿐, 삶을 바른 길로 데려다주는 것은 그 도구를 현명하게 쓸 수 있는 지혜로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진리를 추구하지 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변화에 적응해라는 것이다. 최근 ‘텍스트보다 콘텍스트를 따져라’는 것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장자, 불교와 같은 동양철학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는 추세다. 명상으로 진리를 깨닫겠다는 선 사상은 세상을 바꾸고 있는 기업의 주요 철학과 활동 중 하나이다. 물처럼 형태가 없어 막힘이 없는 것을 따르고자 한다. 이는 곧 흐름을 읽고 다양한 개체들을 융합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렇게 오상아는 자신을 지움으로써 다양한 존재들을 재조합할 수 있는 플랫폼화가 되는 행위이다.
최근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위 아 40>이었다. 40대를 앞둔 극작가 흑인 여성 라다 블랭크가 어릴 적 꿈이었던 래퍼가 되는 성장 드라마였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FYOV(Find Your Own Voice)를 외친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라. 네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라. 고 외친다.
촉망받던 주인공은 근 10년간 무명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주류 작가로서 데뷔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 기회란 기존 권력의 입맛에 따라 각본을 수정하고, 감독을 선임하고, 맘에 들지 않는 인물을 탄생시키면서 얻게 된 보상이었다.
정작 그녀의 작품이 첫 선을 보이는 날, 그녀는 연극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자 관객의 갈채가 쏟아진다. 연극이 끝나서야 극장에 들어선 그녀는 만감이 교차한다. 대중은 기존의 문법에 호응한 것이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연극은 쓰레기다. 나의 목소리를 찾아 떠나겠다.”
그렇게 주인공은 40대 여성 래퍼가 된다.
여기서 나는 오상아가 떠올랐다. 연극의 성공은 그녀가 자신을 버림으로써 얻게 된 결과였을까. 래퍼가 되는 것이 진정한 그녀의 삶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두 질문에 두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첫 번째, 비록 자신의 아이디어가 완벽하게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요구에 맞게 내어놓은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녀가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갈 수 있지도 않을까라는 가정. 두 번째, 래퍼가 된 그녀는 결국 서사를 쓰고 연극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것이라는 가정.
그리고 이어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그녀가 극작가로 성공하고, 다시 프로듀서를 찾아가 랩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녀가 극작가로 다음 작품을 완성한 후, 앨범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면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와 명예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오상아와 FYOV
나의 목소리를 찾는 동시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가치를 품을 줄 아는 것.
어려운 일이다.
©️sce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