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억눌렀던 눈물이 결국 터져 나왔다. 아내의 죽음과 엄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가던 두 인물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남자가 여인을 만난 것은 연출자로 초대받은 연극제 주최 측에서 운전기사를 붙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5년 된 빨간색 자동차는 그의 아주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그 안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사람은 그의 아내가 유일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내가 없을 때는 그의 아내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준 연극 대사에 맞춰 그녀와 대화를 했다. 대화 속에 그는 살아 있음을 감각할 수 있었고,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 겨우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차에 불청객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그는 운전을 함으로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운전대는 겨우 붙잡고 있는 자신의 삶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것은 곧 그의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같았다. 때문에 완강하게 주최 측의 운전기사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주최 측의 사정에 의해 운전대는 젊은 여인에게 맡겨진다.
운전기사의 실력은 놀라웠다. “마치 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라고 남자는 말한다. 운전하지 않는 자신의 차에 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금방 적응했다. 어쩌면 그녀의 운전실력보다는 그녀가 가진 특유의 호흡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색했던 인연은 아주 빠르고 자연스럽게 맺어졌다. 빨간 차는 이제 낯선 사람이 낯선 길을 달려 새로운 목적지를 향한다. 남자의 세계는 이로써 더욱 확장된다. 운전기사와의 대화는 고독과 고립의 시간,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만이 반복되며 돌아가던 시간을 새로운 궤도에 올려놓았다.
남자와 여자의 대화는 점점 길게 이어지며 깊어진다. 그 둘은 서로가 어떤 죄책감에 짓눌러져 있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서로를 완전히 믿게 되고 같은 방향을 향해서 가게 된다. 엉망진창인 채로 비틀거리며 그들의 주행은 반복되고, 겹겹이 쌓인 서로의 상처를 둘러싼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상대방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결국 둘은 슬픔의 근원까지 닿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죄가 아니라는 것. 남자가 연출하고 있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삼촌>에서 소냐가 삼촌 바냐에게 하는 대사가 서로의 언어로 전달된다.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 낼 거예요. 우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안식을 잊은 채 일할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 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 무덤 위에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노라고. 그러면 하느님은 우릴 가엾게 여기시겠죠. 나는 착한 우리 삼촌과 함께 아름답고 찬란하고 멋진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면서 지금의 불행을 감격과 미소 속에서 돌아볼 거예요. 그리고 우린 쉴 거예요.’
‘둘 사이에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 특별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대화하고 시도하며 ‘입속의 검은 잎’을 내밀고 호흡을 뱉어내는 것. 그럼으로써 쉼을 찾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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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수어,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등 서로 다른 언어로 연극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너무나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