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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Mar 11. 2024

정지척 난민 로기완이 경제적 철학적 난민에게 묻다

[넷플릭스] 로기완

이제 우리나라에서 탈북민을 북한이탈주민으로 부른다. 반면에 해외 북한 난민은 탈북민, 그대로 호칭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상 영토를 한반도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을 지향한다. 따라서 북한주민도 우리나라 국민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헌법적 명령이 작용한다.



2006년 벨기에로 도착한 한 탈북민은 난민신청을 했다. 난민은 국제법상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신분,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등의 사유가 있을 때 받아들여진다. 탈북민의 경우 북한 인권 실태 등의 사유로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탈북민의 경우 탄광에서 일을 하다 실수로 발생한 사고로 인한 과중한 처벌이 두려워 도망쳤다. 그에게 남은 숙제는 조선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인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는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했다. 그러나 한국대사관은 자신이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뚜렷한 증빙이 없다는 이유로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그에게는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한국 대사관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북한인을 가장한 조선족이 아니냐라는 의심만을 더 강하게 했을 뿐이다. 그들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여야 할까.


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15823.html​​



로기완은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판 돈으로 브로커를 통해 벨기에에 도착했다. 이후 난민 심사가 이루어졌다. 그 기간이 상당했기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하며 견뎌야 했다. 공중화장실은 자신의 집이었고, 쓰레기통은 식량저장소였다.


난민 심사 과정에서 자신이 조선족이 아니라 북한주민이라는 것을 여러차례 증빙했지만, 벨기에 당국은 계속해서 난민자격 부여를 꺼려한다. 아무래도 이방인 수용에 대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그리 달갑지 않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또한, 난민으로 발생되는 여러 범죄가 이슈화되면서 그들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로기완은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난민 자격을 얻게 된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영화같은 비현실적이다. 이후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 열심히 일해 돈을 모은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벨기에를 떠난다. 그때, 들리는 대사는


“난민의 의미는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권리였다.”


사람은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환경에 지배당하게 되는 경우 자신의 자유를 저당잡힌 채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하게 된다. 북한은 대표적인 폐쇄된 독재정권이다. 핵보유로 인해 서방국가의 강한 경제제재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북한의 경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에 GDP는 한국의 1.7%밖에 되지 않는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체제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독재국가는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공포정치가 득세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최근 김정은은 지방에 공장을 지으면서 경제 부양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원자재 부족, 처첨한 내수 시장 환경으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다수다.


https://m.yna.co.kr/amp/view/AKR20240311010400504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로기완 같은 자들은 탈출을 꿈꾸지만 해외 난민의 수는 몇 백(약 240여명), 한국 내 북한이탈주민은 고작 3만여명으로 소수 뿐이다. 중국에는 2000년 초반에 30만명 정도가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있다. 코로나 이후 더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담보로 한 탈주는 쉽지 않다.


영화 <로기완>은 북한의 인권에 대한 고발이라기 보다는 난민에 대한 인식 제고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한, 난민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정직하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한 인간의 선한 의지를 칭찬한다. 반면에 그들보다 여건이 더 나았던 조선족 공장 동료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기완을 배신하는 것을 그려냄으로서 난민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벗겨내고 피해자 신분을 더욱 공고히 다지며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또한 부유하지만 방황하는 여인과 로기완을 대비시킨다. 그녀의 정신적 피폐로 망가진 삶이 로기완이라는 “단단한” 삶으로 지탱된다.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은 도망치거나 망가뜨리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고, 당당히 부딪히고 맞서 싸울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유한 자가 난민을 통해서 이 의미를 배운다는 설정은 로기완을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상승시킨다.


로기완의 스토리는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정치적 난민 로기완이 경제적, 철학적 난민인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자유로운가. 우리는 풍족하다. 풍족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경쟁하며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인생의 의미를 소멸시키고 있다. 이 안에서 로기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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