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셜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이들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였습니다. 유색인 인권 향상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죠.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긴급하게 연락을 받습니다. 어떤 흑인이 백인 유부녀를 겁탈했다는 누명을 쓰고 법정에 넘겨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셜은 한 걸음에 그곳에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나 변호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문제는 이곳의 법정, 코네티컷 주 브리지포트에서는 외부 주의 변호사, 특히 흑인 변호사가 변호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셜은 유대인 민사소송 전문 변호사인 샘 프리드먼과 함께 변호를 시작합니다.
프리드먼은 처음에 공동 변호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는 백인 중심의 고객을 상대로 잘나가던 민사 소송 변호사였고, 흑인을 변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객들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유대인인 자신도 결국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흑인 차별을 막는 것이 세상 모든 차별을 없애는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프리드먼과 마셜은 조셉 스펠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영화는 이후 마셜과 프리드먼이 스펠을 변호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 안에는 만연한 차별과 그에 맞서는 용기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는 몇 가지 역사적 진실과 메시지를 남깁니다. 먼저, 차별 해소와 같은 인권 향상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기득권의 폭압과 대중들의 무관심, 그리고 당사자들의 자포자기의 장애를 넘어 힘겹게 얻어낸 것입니다. 정의는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손해를 감수하고, 외면을 견디며, 기득권과 충돌해야만 정의는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두번째, 시대정신은 억지 주장이나 폭압적인 시스템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물길을 억지로 막아도 결국은 방향을 바꾸며 흘러가듯,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은 반드시 어디선가 다시 터져 나옵니다. 누군가는 그 흐름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그 뒤를 따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와 자유는 그렇게 저항하고 인내한 사람들의 용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차별은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할 때 발생합니다. 차별은 공동체에 혐오와 증오를 조장하며, 통합과 협치를 방해합니다. 이러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영화는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무죄 표결로 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용기입니다.
차별 없는 사회는 타인을 ‘틀렸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편견을 벗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려는 작은 시선의 변화, 그 용기 있는 출발이야말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되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과거로부터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다시 후퇴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