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할수도 장애를 남길 수도 있다.
나를 긍정 해주는 곳에서 재활이 시작된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20대 초반, 즉 2010년만 해도 사람들은 정신과를 가면 ‘빨간 줄이 그인다’고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빨간 줄은 범죄경력 같은 것은 아니지만서도, 취업에 방해가 되고, 인생의 앞길을 어둡게 만드는 선명한 주홍 글씨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과는 달리 ‘정신을 치료한다’라는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일 거다. 애초에 마음이 아플 때 병원을 가서 치료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면 ‘정신과를 가면 빨간 줄이 그인다’는 괴소문도 퍼질 일이 없었겠지. 우리 사회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그저 정신력이 약해서 ‘낙오되고 도태된 패배자’로만 인식했으니, 제대로 된 치료 환경이 갖춰질 수도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 따돌림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가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으로 발전했던 케이스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입대했다가 그 현상이 너무 심해져서 1년 차일 때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시도하던 과정에서 당직사관에게 발견되어 죽지는 않고 살아남아 의병전역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있던 부대가 다른 부대보다 분위기가 나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부서지기 쉬웠던 내게 있어서, 유일하게 믿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군대라는 곳은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전역 직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도 해보고, 최면 치료도 받아봤지만, 효과적으로 회복할 수는 없었다. 그때 치료 과정에서 먹은 약들은 나쁜 충동을 제어하기 위해 내게 무기력감을 심어주었고, 그저 목숨줄을 조금 더 붙잡고 있는 역할에 그쳤다.
나는 오히려 정신과 치료보다는 미대 입시를 통해서 제대로 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원래부터 미술은 좋아했지만, 중학교 때 성적이 제법 나와주는 바람에 선생님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나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생활은 따돌림으로 인해 완전히 꼬여버렸고,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내가 성적이 나올 리도 만무했다. 결국 고3 때 부모님께 ‘전역하면 미대 입시를 하겠다’고 협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역한 뒤에 정말 말했던대로 미대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만다행히도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잃어버렸던 자신감과 의욕, 그리고 삶의 의지를 빠르게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는 기쁨으로 불안정한 정신을 달랠 수 있게 된 거다. 비록 늦깎이 수험생에 그림을 그다지 잘 그리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래전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문화컨텐츠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발전이 빨랐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주는 순간이 찾아왔고, 나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마음의 재활을 위한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미대를 졸업한 이후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마음의 재활에 힘썼다. 이번에는 운동이라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어릴 적부터 동경만 해왔던 격투기의 세계를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실현한 것이다.
원래는 그저 게임과 액션영화에서 무술가가 적을 때려잡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는 이유로 관심을 가졌던 거지만, 그 관심의 불꽃이 복싱과 킥복싱으로 옮겨 붙고, 이후에는 UFC를 매주 챙겨보는 팬심의 영역으로까지 커진 상태였다. 하지만 ‘팬심은 팬심일 뿐, 언제까지고 입으로만 떠들기보다는 직접 몸으로 따라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배우러 가게 된 거다. 살면서 싸움이라는 것을 거의 경험 해보지 못했던 나였기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막상 운동을 배우러 간 체육관은 생각 외로 매우 평화롭고 즐거운 곳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섞여서 운동하고 있었고, 편견 없는 사람들이 처음 방문한 나를 반겨주었다. 그곳에서는 내가 찐따였던 과거도,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시절도 다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체육관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저 운동을 즐기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고, 체육관 밖에서의 내 모습에 대해서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을 열심히 하는 나를 존중해줄 뿐이었다.
그들 또한 사회생활에 지쳐 머리를 비우러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 사회생활과 관련된 복잡하고 머리 아픈 얘기가 아닌 순수하게 ‘킥복싱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라거나 ‘지난주에 열린 격투기 경기’에 대한 얘기 정도만 나누었다. 온 정신이 취미에 순수하게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열정과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앞선 재활 경험들 덕분에 나는 속으로 먹어들어가듯 웅얼거리는 발성도 고칠 수 있었고, 내 몸에 대한 자신감도 늘어났으며,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 위축되거나, 사람의 눈을 못 마주치는 경향도 많이 줄어들었다. 내가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경험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피해 갈 수 있었고, 약해진 내 상처도 아물 수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고, 사람들은 전부 나를 기피하거나 혐오할거라고 생각했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서 세 개의 사회에서 쭉 이어져갔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개선하려고 해도 한 번 뒤처진 사회성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당연히 낮았고, 영악한 인간들을 상대로 그런 약점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를 둘러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식되어 갔던 거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점점 걷혀갔다. 사람들이 나를 존중해주고, 인정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면 오타쿠라고 놀림 받았다(당시에만 해도 슬램덩크나 원피스같이 지금은 대중적인 만화 캐릭터를 그려도 일단 놀림당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미대에 들어가서는 오히려 나보다 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아무도 그걸 가지고 놀리지 않았다.
또, 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이 학교 선생과 동급생으로부터 혐오 받던 시절이 있었다(중학교 때 짝꿍은 내 손 쓰는 게 보기 싫다며 오른손으로 바꾸라고 강요하고, 선생님에게 고자질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미대에 가서는 소수자가 아니게 되었다. 넷이서 같이 밥을 먹는데 셋이 왼손잡이였던 적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는 킥복싱장을 가도 ‘사우스포(왼손잡이를 뜻하는 스포츠 용어)라니 귀한 분 오셨네’라고 대접받기도 했다. 게다가 이전에 다른 곳에서는 그저 덩치 크고 둔하게 생겼다면서 무시받던 내 체형이, 골격이 좋다는 말로 포장되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패션에는 방해가 되는 근육 있고 뼈대가 굵은 체형이 운동인들에게는 워너비였던 거다.
이런 사례들이 정말 지금 돌아봐도 사소한 것들이지만, 나를 긍정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학창 시절에 국・영・수 성적이 좋다고 선생한테 칭찬받고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들이 내가 가진 고유한 특성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점차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나도 쓸모가 있는 사람이구나’, ‘나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구나’, ‘나도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맺음.
지금까지 쓴 글만 보면 재활이 다 끝나고, 이제는 완전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도 여전히 불안정한 면모가 많은 사람이다. 어릴 적에 생긴 마음의 상처는 제법 아물었지만, 피가 나질 않을 뿐 아직도 흉터 자국이 선명하다. 이제는 나이가 30대 중반이니만큼 남들이 내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해 주지는 않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행동거지가 지극히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기 싫은 바람에 내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스몰톡을 이어 나가기도 버겁다.
대학생 시절에는 과거의 나와 달라져가는 모습에 심취해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까 봐, 항상 스스로에게 나대지 말자고, 조신하게 행동하자고, 주문처럼 외우기도 했었다. ‘누군가가 내게 잘해주면 속지 말자, 그건 분명 어떤 속셈이 있기 때문에 하는 행동일 거다’라고 생각하면서 모두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누구에게도 밉보이기 싫어서 모두를 사무적인 친절함으로 대했고, 결국은 7년간 어느 누구와도 사적인 연락을 나누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기도 했다. 상대와 깊은 관계가 되면 상대방이 내게 기대 혹은 무리한 요구를 할까 봐, 혹은 상대방이 내게 상처를 줄까 봐 겁이 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소극적인 행동들이 매우 아쉽긴 하다.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다가갔으면’, ‘그래서 정말 친해지고 관계가 싶어진 사람들이 있었다면, 지금의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자산이 되질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찬란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청춘. 그 청춘을 거세당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움츠러든 채로 살아왔다. 썸도 타본 적 없고, 당연히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도 없다.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를 놀러 간다거나, 술집에서 헌팅을 해본 경험도 없다. 그때의 나는 인생을 즐기기 위한 것에 힘을 쓰기보다는, 그저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일하는 데 힘썼다. 20대 초반에 앓았던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뒤처진 시곗바늘을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맞추기 위해서 내 청춘을 즐길 여유가 없었던 거다. 때문에 20대 때, 더 많은 추억을 쌓지 못했다는 게 돌아오지 않을 청춘에 대한 미련을 남긴다.
그럼에도 내가 정말로 틀린 선택을 한 것이냐고 되묻는다면, 확답을 할 자신이 없다. 분명 내가 그때 조금 더 과감하게 살아서 더 많은 인연이 생기고, 아주 좋은 사람과 행복한 연애를 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인간관계에 대해 더 폭 넓고 트인 시야를 갖추거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인간관계가 또 다시 꼬여서, 모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깊은 동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리는 상황이 생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오징어 게임에서 달고나를 침으로 충분히 녹이지 않고 바로 바늘로 찌르다가 부서져 버리는 상황이 나왔듯, 내 마음이 부서져서 다시 접합할 수 없게 되었을 가능성 말이다.
요즘은 어린 시절에 왕따나 직접적인 폭력, 가정 내 불화, 성폭행 트라우마 등으로 인해서 인생을 짓밟힌 뒤에 정상궤도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져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했다는 기사가 나오곤 한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자취방에 갇힌 채로 세상을 원망하는 이들. 분명 나도 비슷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차근차근 재활해나가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그들 중 하나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뒤 사정 모른채 그들을 힐난하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부모님 등골 빼먹는 쓸모없는 인간들’이라면서 그들이 과거에 겪은 상처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현실만을 보고 멋대로 판단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들은 피해자들이 겪은 시련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그들의 행동을 재단한다. ‘정신 차리고 사회로 나가야 뭐라도 해 먹지, 방 안에서 시간만 축내면 아무것도 안 바뀌어’라는 말은 분명 일반 사람들 기준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걷어 내고, 트라우마를 가라앉히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부러진 뼈를 회복하는 것만큼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부목 대 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뛰라고, 뛰면 된다고 떠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들은 앞서 말한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단어를 쓸 단계를 이미 지나쳐버린 사람들이다. 난 뼈가 부러진 사람들에게 뛰라고 말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그들에게야 말로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다.
뼈가 부러진 사람이 못 걷는다고 해서 ‘의지력이 부족해서 그래, 뼈는 마음만 먹으면 붙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부디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비슷한 태도로 대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의 뼈가 부러진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게 밀어붙이는 말보다는 응원이 필요하다. 내가 아직도 재활에 힘쓰고 있듯이 이 과정은 오래 걸리고, 고독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 부디 사회가 채찍질보다는 응원으로 가득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