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할수도 장애를 남길 수도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참 멋진 말이다. 금속이 망치로 내려치는 단조 과정을 통해 더 밀도 있고 튼튼해지듯이, 사람 또한 시련을 통해 강해질 수 있다는 의미니까. 인생에서의 크나큰 시련과 풍파가 사람을 힘들게 만들어도,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심지가 굳어지며, 끝끝내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니,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이 말이 진취적이고 멋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진 긍정적인 의미만 생각하기에는 그림자가 생각보다 너무 짙다. 발전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저 말을 맹신하고 따른다. 그리고 이 말을 핑계 삼아 남을 파괴하거나, 스스로를 파괴해 댄다. 지금 당장에 자신이 죽을 것 같아도 의지가 부족해서 그렇다며 본인을 고문하는 사람들도 있고, 힘들어서 숨을 돌리는 사람에게 저 말을 인용하면서 가스라이팅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아파온다. 아직도 마음속 깊이 있는 수십 개의 흉터가 가려워 온다.
사람의 회복력은 정해져 있다.
사람들은 종종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들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눈 치우듯 깨끗하게 해치울 수 있다고 믿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만 없을 뿐, 결국 마음도 몸처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내 신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알다시피 스트레스성으로도 충분히 원인 불명의 위장장애라던가 두통, 여러 가지 장애가 발생하기도 하고, 체력이 약하면 마음이 제일 먼저 무너지고 예민해진다.
그런고로 몸이든 마음이든 회복하는 데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손이 베이면 사흘은 걸리고, 뼈가 부러지면 몇 개월이 걸리고, 내장이 다치면 몇 년까지도 걸리듯이, 사람의 마음도 크게 다치면 회복하는 데 더 큰 시간이 걸린다. 그런고로 마음에 가해지는 상처가 크면 클수록 그 과정은 트라우마로 남아, 앞으로도 시련을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당신이 길 가다가 넘어져 상처가 생겼다고 쳐보자. 손으로 땅을 짚는 바람에 손바닥에 구멍이 생길 정도로 크게 까졌다. 손이 완전 걸레짝이 되었지만, 당신의 직업은 손을 많이 써야하는 직업이다. 오늘 한 일 때문에 손바닥이 자꾸 쓸린다. 회복되어 가던 손바닥 피부는 지속적인 쓸림 때문에 다시 넝마가 되어버린다. 당연하게도 손이 회복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지고, 다 낫더라도 커다란 흉터가 자리 잡게 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 또한 마찬가지다. 어릴 적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거나, 가정 폭력을 당했다거나, 이 외에도 감당하기 힘든 많은 일들 때문에 상처를 입으면, 당연히 그 시련을 어렵사리 극복했다 치더라도 한동안은 상처가 아물 때까지 스트레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다쳤으면 당연히 치료를 마쳤어도 통깁스를 한 채로 시간을 보내야 하듯이 말이다.
그 시련이 나를 당장에는 죽이질 못했어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로 계속 쌓아나가다 보면 영구적인 흉터나 장애가 생길 수는 있다
마음에도 재활이 필요하다
물론 스트레스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이, 마냥 쉬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의학에서도 옛날에는 부상당한 관절 등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쉬면서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나, 지금은 기능의 회복을 위한 재활치료도 권하는 편이다. 당연히도 마음 또한 점진적인 재활이 필요하다.
따돌림과 거절, 비난으로 인해서 타인에게 경계심을 품게 된 사람에게는 추가적인 거절과 비난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줄 필요가 있다. 이미 그 전의 나쁜 경험들로 인해서 약해져 있을 마음을 가혹한 환경에 노출해 둔 채 방치하면 재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커진 나머지, 나중에는 흑심 없는 선의조차도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아무런 인간관계에도 엮이지 않고 혼자서 회복하라고 하면 그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더 이상의 거절과 비난, 따돌림을 겪지 않아도 되기에 상태가 더 악화하는 것은 늦추겠지만, 결국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여태껏 경험했던 모든 관계에서 인간의 나쁜 면만 보았을 테니까, 인간관계에서 얻은 트라우마를 좋은 기억으로 뒤덮는 ‘재활 과정’으로 회복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물론 재활 과정은 쉽지 않다. 부상 당해서 재활 중인 운동선수들이 우울증을 겪는다는 통계도 있다. 논문마다 다르지만 대략 30-40% 정도 된다는 것을 보면, 몸과 마음이 얼마나 밀접하게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재활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재작년에 발목 수술을 크게 하고 나서(1,000만 원이 넘게 드는 대수술이었다) 자존감이 깎이고, 완벽히 회복했다고 생각했던 우울증이 돌아와 고생 꽤 했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마음에 대한 재활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이다. 비록 20대 초반처럼 매일 죽고 싶고,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시절에 비하면 굉장히 아주 좋아졌지만, 아직도 사람이 어렵고, 의심되고, 두렵다. 그런데도 애써서 모임 등에 나가면서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려고 애쓰고 있다. 어릴 적에 배신과 따돌림을 경험한지라, 아직도 낯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거나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지만, 악의로 가득 찬 타인들로부터 괴롭힘당했던 경험을 조금씩 긍정적인 기억이 밀어내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옛날 경험들에만 의존해서 ‘사람은 다 똑같다’라고 치부해 버렸다면,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이 정체되었을 거다. 앞으로 남은 인생이 현재까지 살아온 인생보다도 훨씬 길게 남았는데, 모두가 내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은 채 살아가는 건 정말이지 견뎌내기 힘든 일이다. 난 두려움을 무릅쓰고 느리지만 꾸준히 재활에 힘써왔다.
비록 내가 20대 초반까지 경험해 온 타인에 대한 경험들 대부분이 안좋았다고 해도, 내가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준 소수의 사람들의 도움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낯도 많이 가리고, 생각도 많고, 쉽게 상처받는 나같이 까다로운 사람을 위해서 옆에 남아있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소수의 인원이 인간에 대한 불신을 걷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나보고 나약하다고 말하며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너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야’라면서 지지하고 응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