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놈 고르기
'많이 만나보고 이놈이다 싶은 놈, 딱 한 놈만 골라라.'
우리 엄마가 나한테 조언해주신 '남자 고르는 방법'이다. 어느 누가 해준 조언보다 내 귀에 쏙 들어왔다. 덧붙여 이런 말씀도 하셨다. '뭐 굳이 한국인을 꼭 만날 필요도 없고… 너랑 잘 맞는 사람을 골라라'. 난 엄마의 응원에 한껏 탄력을 받아 많은 사람을 만났다. 본격적인 외국 생활 시작 출발선에 서 있었던 그 당시 나는 "탕!" 소리 시작과 함께 전력 질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여러 국적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친구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사이로도 발전하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은 사귀기도 했지만 심각한 관계로 발전을 하지는 않았다. 심각한 관계로 발전을 시키고 싶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짧게도 길게도 남자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난 연애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였다. 군인 자녀의 특혜 (혹은 피해)인 화려한 22번 이사 경력은 다양한 도시의 다양한 아이들을 접할 기회를 줬다. 도시를 자주 옮겨 다녔던 나는 친구에 대한 애착이 특별하고 강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와 같이 애틋한 친구가 있었고, 중학교를 입학하자마자 공식적인 남자 친구도 생겼다. 근데 너무나 다양한 도시와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새롭지 않으면 금방 질려해 했다. 사귀는 관계가 오래가진 않았다. 짧을 때는 1, 2개월 길게는 6개월이 고작이었다.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조금 더 긴 연애를 했지만 짧은 만남은 계속되었고 1년이면 정말 오래간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 국적도 나이도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다. 만나는 기간이 짧은 경향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연애를 했던 건 아니다. 좋아하고 사랑했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 사람을 만나면서는 그 사람과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이사를 많이 다녔던 나는 만남의 속 이야기도 다양하다. 내가 잠시 일본 교환학생을 간 동안 남자 친구가 내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때도 있었고,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만나서 결론적으로는 내가 바람을 핀 것처럼 된 상황도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 진드기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끝이 깨끗하지 않은 남자 친구도 있었고, 깨끗하게 '안녕' 한마디에 서로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각자 길을 가는 쿨한 연애도 했다. 외국 남자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한국 사람과 큰 차이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남자가 외국 남자들보다 훨씬 더 헌신적이고 세심한 것 같다. 그 헌신적인 관계가 내가 한국 남자를 사귀었을 때 가장 잘 안 맞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 연애의 하이라이트는 영국에서 패션 전공 대학교에 다닐 때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만난 마지막 남자 친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가 꿈꿔온 이상형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채우는 남자였다. 이왕이면 잘 생긴 게 좋다고 지나가는 여자들이 고개를 돌려 뒤돌아볼 정도로 모델 뺨치는 훤칠한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웃는 건 또 얼마나 순수해 보이는지, 어딜 가나 그의 외모 때문에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친구에게 초대받았던 파티에서 만났는데, 우린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끌렸다. 파티 내내 즐겁게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며 둘만의 눈빛 교환과 파티 내내 단둘 이만 수다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우리 연애는 전 남자 친구의 데이트 신청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내가 다니는 대학교 내에서 자기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덕에 내 커피와 샌드위치는 항상 공짜였다. 캠퍼스에서 자주 얼굴을 보는 것도 덤이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남자 친구로부터 결혼식에 함께 가자는 부탁을 받았고, 아무 생각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 알고 봤더니 그 자리는 12명만 초대받은 최소 규모 결혼식이었다. 그 결혼식은 남자 친구의 아버지 회사 임직원 자녀의 결혼식이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최소 규모 결혼식에 초대를 받는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사람들만 참석하게 된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셰프가 직접 와서 음식을 차려냈고, 실버웨어와 화려한 장식들로 채워진 최고급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에 가서야 그 사실을 안 나는 신랑도 신부도 모르는 내가 왜 그 자리에 초대되었는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남자 친구에게는 내가 공식적으로 '첫 여자 친구' 데뷔를 하는 자리였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는 손에 꼽히는 부동산 부자셨고 노팅엄 도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였다.
전 남자 친구는 대부분의 영국 남자들처럼 술을 좀 자주 마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잘 맞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공식 '첫 여자 친구'가 되면서 주변의 관심이 나에게 초집중되었다. 그를 흠모하던 여자들은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했고 그런 피곤한 상황이 과히 즐겁지 않았다. 함께 파티를 가게 되면 언제나 그 분위기에 휩쓸려 파티가 끝이 나야지만 끝을 냈다. 남에게 이끌려 다니고 스스로 먼저 끊어 낼 줄 몰랐다. 외모만큼이나 당당하게 자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나 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너무 몰랐다. 겉모습은 이상형이었지만 속은 내 이상형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할 시기가 되었을 즈음 겉 조건만 이상형이었던 그와 헤어졌다.
굳이 사귀지 않더라도 친구로서든 연인으로서든 사람을 많이 만나보면 좋은 점이 확실히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고 어떤 부분을 싫어하는지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성 친구, 동성 친구, 그리고 사귄 남자 친구들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에게 반응하는지 배웠고, 나를 더 잘 알아 갈 수 있다. 새로운 나라에서 사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러 다닌 것이 나를 배워가는 가장 큰 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사람, 잘 맞는 사람, 절대로 안 맞는 사람 등 호불호가 갈리게 된다. 유머가 있지만, 말이 많은 것은 싫고, 얼굴이 잘생긴 것보다는 매력적인 사람이 좋다. 줏대 없이 남의 이야기에 흔들리는 팔랑귀보다는 고집스럽더라도 자기주장을 부드럽게 관철하는 사람이 좋다는 등 내게 맞는 사람의 성격, 가치관에 관한 사람 게이지가 잡히기 시작한다. 내겐 밖으로 보이는 조건보다는 같은 방향을 쳐다볼 수 있는 가치관과 생각의 흐름이 맞는 게 더 중요했다. 만나보지 않고서는 좋은 사람을 고를 눈이 키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발견해내기 힘든 나의 모습을 모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난 그런 사람이 좋았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 파티의 주인공으로 휩쓸려 다니는 사람보다 파티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을 챙기고 그들과 대화를 나눠주는 사람. 두려움 없이 사랑을 자기 방식대로 표현할 줄 아는 로맨티시스트.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원하는 일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숫자에 밝은 사람. 정리를 잘하고 깨끗한 사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며 먹을 줄 아는 사람. 자기 공간이 필요한 사람. 온전히 내게 기대려 하는 사람보다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람.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사람.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이 싫었다.
자기가 잘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 삶에 열정이 없는 사람. 게으른 사람. 배 나온 사람. 운동하지 않는 사람. 남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 책임감 없는 사람. 자기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는 사람. 친구가 없는 사람. 친구나 가족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 남을 헐뜯거나 욕을 하는 사람. 허풍이 많고 말이 너무 많은 사람. 시끄러운 사람. 헤세 부리는 사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
난 그렇게 내가 정말 좋아한 부분을 가지고 있고, 정말 싫어하는 부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다. 남편을 만남으로써 내 삶은 완전히 변했다. 난 비혼 주의자에 비출산 주의자였다. 그랬던 내가 남편을 만나 이 사람이라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생겨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결정은 내 평생 결정한 수많은 것 중 가장 잘한 두 가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일상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매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바로 남편과 아들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치부마저도 온전하게 받아주는 내 편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것이 없다.
2005년 헤어졌던 그 전 남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15년이 지난 2020년 여름. 그는 내게 고맙고 미안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이 너무 어리숙했고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혼자인지를 알고 싶었다며 연락이 왔다. 내가 만났던 그때보다 그는 더 단단해졌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하나둘씩 잘 이뤄나가고 있었다. 철인 경기에도 참여하고 더 건강한 마음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난 그에게 나를 기억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너무나 아껴주는 아름다운 사람과 결혼해 건강하고 밝은 남자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얘기해줬다. 전화를 끊고 나니 함께 했던 시간과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선하고 아름다웠던 눈과 웃음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사실 난 그에 대해 나쁜 기억이 없다. 우린 그저 서로에게 맞지 않는 그런 사이였을 뿐이다. 조건으로는 완벽했던 그. 난 그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난 남편에게 '잘 지내냐고 전 남자 친구한테 연락이 왔네.'라는 한 마디로 전 남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남편의 대답도 간단했다. '아, 그래?' 그리곤 그게 우리가 나눈 내 전 남자 친구의 기억 소환의 끝이었다. 그리곤 여느 평범한 날처럼, 남편과 나는 '우리의 행복한 일상 수다'를 떨었다.
엄마가 알려주신 '많이 만나보고 이놈이다 싶은 놈 딱 한 명만 골라라'라는 조언은 내게 결국 내 결혼 상대를 고르게 된 인생 조언이 되었다. 여러 '놈'님들을 만나보면서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나와의 관계가 더욱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나를 잘 알면 알수록 내 짝을 찾는 여정에서도 잘 맞는 동반자를 잘 고를 수 있었다. 딱 한 명만 찾으면 되는 거니까.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놀랍도록 신비하고 새로운 걸 보여주는 관계.
오래되고 식상하기도 한 관계.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드는 관계.
기대하지 못했던 것을 가져다주는 관계.
시작할 때와 완전히 다른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다시 처음처럼 돌아가게 만드는 관계.
그러나 가장 즐겁고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관계는
바로 자신과의 관계다. “
_<섹스 앤 더 시티 6 20회> 사라 제시카 파커의 독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