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결정한 이유 단한 가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확실할 때이다.
_빅토르 위고
내 남편은 핀란드 사람이다. 우린 2002년 영국에서 만났고 대학 캠퍼스 커플이었다. 1년의 연애 후 남편이 졸업하고 스페인으로 갔고, 장거리를 못하겠다는 그와 나는 헤어졌다. 난 미국 뉴욕으로 직장이 정해져서 우린 애인도 아닌 애매한 친구로 1년을 보냈다. 내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자 남편은 나를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나를 되찾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왔다. 우리의 애틋한 사랑은 다시 시작되었고 내가 홍콩, 영국, 한국에서 일하는 4년 동안 모든 나라를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을 항상 동행해 줬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여러 나라를 함께 그리고 따로 살며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 얼굴을 보며 만들어 갔다. 남편의 사업 특성상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공항과 전화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 미국에 소재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취업 비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핀란드로 왔다가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미국으로 가게 되면 한참을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난 10일간 핀란드로 여행을 갔다. 도착해서 5일쯤 되었을 때 남편과 나는 그의 가족 별장으로 갔다. 그 날따라 유달리 바쁘던 남자 친구는 벽난로에 평소와 다른 게 유달리 많은 장작을 넣었고, 샴페인에 촛불에 분위기를 한껏 잡았다. 잠시 후, 나를 벽난로 앞에 흔들의자에 앉혀주었고,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내게 청혼했다. 'Will you marry me? I would like to be right next to you for the rest of my life. “
3분간의 침묵이 있었다. 난 바로 'Yes'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편은 극도로 초조해 있었고, 난 오만가지 생각 속에 내 삶의 동영상을 제작하며 앞으로 빠르게 훑었다. 그와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그는 항상 나에게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을 결정하는 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보다 더 중요한 사항은 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어느 나라에 가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최대한 내 옆에 함께 있었다. 나 역시 국경이나 긴 비행을 넘어서 조금이라도 그와 함께하기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날아다녔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그가 그리고 내가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내가 미국으로 가게 되면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미국 내 거주하고 있어야 하고 남편이 매년 3개월을 들어와 주는 방법밖에 없다. 양방향이 아닌 단방향의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런 상태로 과연 얼마나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했다. '결혼으로 법적인 정당한 절차를 거쳐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 그리곤 대답했다. "Yes, I would love to.', '응, 너랑 결혼하고 싶어.' Yes라는 말을 한 후 5일 후에 시빌 매리지 (Civil Marriage, 신고 결혼이다. 민법상 혼인을 하고 종교의식에 의하지 않은 공무원이 주관하는 제도)를 올렸다. 우린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엄마, 아빠, 미국에 가기 전에 여기서 타비랑 결혼을 하고 갈까 해요.
미국을 가려고 보니 타비랑 함께 오래 있으려면 법적으로 부부가 돼야 하는 데,
전 그러고 싶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빌 매리지를 하기 전 5일 동안 난 부모님과 세 번의 짧은 전화 통화를 했다. 처음 통화는 부모님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차분하셨다. 엄마는 '이놈이다 싶으냐?'라고 물으셨고, 아빠가 오히려 더 충격을 받으셨다. '그렇게 빨리 결정을 해도 되는 거니? 그게 정말 최선의 방법이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구나.' 반응이셨다. 두 번째 통화에서, 엄마는 '그래, 네 결정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네 결정을 믿는다.'였고, 아빠는 '정말 이게 네가 원하는 것이 맞니? 너무 성급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다시 한번 물으셨다. 세 번째 통화에서 엄마는 '생각해보니 네가 외국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네가 더 든든하고 좋겠구나 싶구나. 네 결정에 확신이 든다면 하거라'라고 해주셨고, 아빠는 '결혼은 누구와 언제 어떻게 하라고 부모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급작스러운 결정이 맞는 것인지 많이 걱정되는구나. 하지만 네가 타비에게 확신이 든다면 네 결정을 존중해 주마.'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영국으로 방문을 오셨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나셨다. 사위가 될 사람을 딱 한 번 만나봤으니 부모님의 걱정은 내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엄청난 고민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사귀는 동안 남편과 나는 단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이 없었고, 평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부모님과도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남편의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좋으신 분들인지, 엄마 아빠와 닮은 부분들이 많아 너무 좋다는 이야기도 자주 해드렸었다. 결혼 승낙이 떨어지고 나서는 영문으로 번역 공증된 가족관계 증명서, 혼인 관계 증명서, 초혼이라는 증명서 혹은 전 혼인 사실이 있는 경우, 이혼 판결문 또는 사망증명서 같은 서류를 한국에서 받아서 제출했고, 시빌 매리지는 타비의 누나가 증명인 (Witness)으로 서줬다. 양가 부모님께는 공평하게 초대를 하지 않았다.
우린 결혼신고 한 지 2년이 지나서야 결혼식을 올렸다. 나도 그도 작은 결혼식을 하는 데 동의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아는 사람들 말고, 우리를 정말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결혼 후에도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낼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서로 25명씩 초대했고 총 47명의 하객이 핀란드로 세계 각지에서 날아왔다. 결혼 준비도 간단히 했다. 스페인에서 살고 있었던 우리는 거의 전화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아버님께서 결혼 장소를 확인하러 가주셨고, 음식 테이스팅도 직접 해주셨다. 난 내가 입을 웨딩드레스 한 벌과 결혼식에 쓰일 꽃을 준비했다. 웨딩드레스는 한국에서 지인의 도움을 받았다. 한 곳을 방문했고 마침,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웨딩드레스를 찾았다. 운이 좋게도 아무도 입지 않았던 새 드레스였다. 결혼 장소에 쓰일 꽃은 전화로 주문했다. 남편은 자신이 입을 턱시도를 골랐고, 결혼 케이크를 주문할 곳을 알아봐 주었다. 남편의 누나는 우리 결혼식 사진을 찍어줄 사진 잘 찍는 사진사를 구해주었다.
비혼 주의자였던 나는 그렇게 결혼을 내 방식대로 부담스럽지 않게 시작했다. 결혼 전에 동거를 1년 정도 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내게 딱 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했다. 그리곤 안 맞으면 이혼할 요량으로 결혼신고를 했고, 결혼 전 가족 간의 상견례는 없었다. 양쪽 부모는 우리가 결혼신고를 한 2년이 지난 후 올린 결혼식 때 처음 뵈었다. 신혼여행은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2년이 지난 후에 보라카이로 갔다. 3일 동안 단둘이 허니문을 보냈고, 그 후 Filipino American 친구 집도 방문하고 다른 친구들과 합류해 함께 놀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상한 순서일 수도 있다. 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었다. 내가 결혼을 대하는 마음과 잘 맞았고, 나와 남편에게 딱 맞는 순서였다. 어떻게 결혼을 하고 그 순서가 있어야 하는지는 내 삶의 방식에 맞으면 그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결혼 준비 절차와 순서를 보면 벌써 나는 가슴이 턱! 하고 막힌다. 상견례, 택일, 웨딩홀 알아보기, 결혼식 도우미, 스드메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화보 찍기 결정, 웨딩드레스 투어 (드레스샵을 2~3군데 정해서 드레스 샵당 4~5벌의 드레스를 입어본다), 신혼여행 계획 (숙박, 식사, 교통, 신혼 여행복 결정), 결혼식 본식 사진, 스냅, DVD 촬영 여부, 결혼식 전 웨딩 촬영 (액자와 앨범 나오기까지 1~2달 걸려 보통은 결혼식 3개월 전에 찍는다), 혼수 침구 및 가전 쇼핑, 본식 2~3달 전부터 청첩장 결정, 하객 인원 파악, 예단 3 총사 (예단, 예물, 예복, 등), 본식 3주~4주 전 드레스샵에 다시 방문해 최종 결정, 본식에 필요한 폐백 음식, 신혼여행 다녀와 필요한 이바지 음식 예약, 결혼식 예행연습, 결혼, 피로연, 예식 후 하객께 인사 및 사례비 전달, 신혼여행, 결혼 후 가족, 친지, 주례 선생님 방문 및 감사장 발송, 혼인신고, 집들이, 결혼식 2개월 후에는 사진 및 액자와 비디오 찾기까지.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하고 견디어 내는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결혼비용은 또 어떠한가? 2019년 한국웨딩문화센터의 세계 각국의 평균 결혼비용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신혼집 마련을 제외한 평균 결혼 금액이 6,300만 원 정도로 나타났다. 주택 마련 비용이 전체 결혼비용의 70%를 넘은 것까지 포함하면 억 단위로 넘어간다. 미국 평균 예식비용 약 4,000만 원이지만 지역에 따라 극심한 차이가 있다. 뉴욕 맨해튼 평균 8만 2299달러 (2019년 시점에서 약 9,700만 원)이 가장 높고 알래스카는 1만 7773달러 (약 2,000만 원) 소요돼 가장 저렴했다. 캐나다 32,000달러 (약 3,780만 원), 중국 3,600만 원~ 6000만 원, 호주 약 32,200 달러로 한화로 약 4,300만 원, 일본 약 4,700만 원, 영국 3,000만 원~4,500만 원 등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더라도 각국의 결혼비용은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다.
나와 남편이 쓴 결혼식 총비용은 대략 3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나와 남편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견적 안에서의 결혼이었다. 우리 둘 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결혼이 아니었다. 결혼식은 남편과 내가 서로를 존중하고 잘 살겠다는 약속을 우리 인생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 둘 다 당연히 우리 돈으로 해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추억과 기억은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으로 내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다.
어떤 결혼식을 준비하고 결정하는지는 커플의 몫이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딱 하나의 정규화된 결혼 절차나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결혼비용과 절차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결혼'이라는 그 의미 자체가 퇴색하고 결혼 전부터 이미 혼수로 싸움이 일어나고 헤어지는 경우까지 생긴다. 물론 결혼식 준비로도 헤어지는 관계라면 차라리 결혼하기 전에 깨지는 것이 낫다고도 생각한다. 둘이 함께 풀어가야 할 그 수많은 고난과 역경은 결혼식을 올리는 문제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보다 자주, 크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결혼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하기로 가족 친지 친구들 앞에서 서약을 맺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날이어야 한다.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의 결혼 서약을 하는 날이다. 서로가 '사랑한다는 확신'을 공표하는 날이다. 그런 날을 꾸미는 기준과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주어야 하지 않을까?
규격화된 결혼 말고도 다른 형태의 다양한 결혼이 있을 수 있다는 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규격화된 결혼식을 하지 않았다고 쉬이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이 어떻게 판단할까 하는 눈치 부담을 좀 덜어내고, 상대방의 집안에서 해줘야 하는 '당연하지 않은' 기대를 낮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결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을 했다고 결혼 생활까지 성대하고 화려하지 않다. 결혼 후야말로 진정한 결혼 생활의 시작이다. 결혼식을 어떻게 하느냐와 결혼식 후에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사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결혼식 후의 고민보다 결혼식의 고민이 훨씬 크다면 우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결혼식은 결혼의 끝이 아니라 시작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