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장례식과 나의 다짐
2015년 5월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핀란드에 계셨었고 남편과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살고 있었다. 시어머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아버님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꽉 안아주었다. 부고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최대한 말을 줄였고 조용히 하루를 보냈다. 남편에게 시아버님은 너무나 가까운 친구 같은 아빠이자, 존경의 대상, 사업 멘토어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둘은 유달리 사이가 좋았고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았다. 시아버님의 죽음은 남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 테다.
핀란드로 바로 날아가진 않았다. 사고로 사망을 하거나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가 아니라면 핀란드에서는 모든 사람을 부검한다. 억울한 죽음이 없어야 한다는 핀란드의 법적인 절차로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것이다. 시아버님께서 집에서 돌아가셨기에 부검이 끝날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남편은 울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마음에 난 섣부르게 위로의 말을 해주려 하지 않았다. 차분히 기다려주는 것 말고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혼자만의 애도의 시간일 테다.
장례식은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개월가량 지나고 했다. 가족과 친지만 참여하는 가족 장례로 결정되었다. 핀란드 장례식은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다. 국가의 종교가 루터교이기에 루터른 성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무덤은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장례식이 끝난 후에 운구를 수레에 실어 옮긴다. 보통 겨울에는 꽃과 초를 여름에는 꽃을 관 위에 한 명씩 돌아가며 올려준다. 하관 후에는 장례식장에서 멀지 않은 연회장을 빌려 식사를 하고, 고인에 대한 추억을 충분히 나눈다. 고인과 함께했던 특별한 이야기, 웃긴 에피소드, 황당한 이야기 등 웃고 우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시를 낭독하기도 하고, 시아버님이 좋아하셨던 노래를 틀거나 바치고 싶은 노래 부르기도 했다. 나는 시아버님이 해주셨던 양고기 찜과 빨강 가재가 얼마나 맛있었는지와 시아버님의 해박한 지식에 항상 많은 것을 배웠다는 기억을 꺼내 얘기했다. 식도락도 좋아하시고 음식을 만드시는 것도 즐기시던 분이셨다.
핀란드에서의 시아버님의 장례식은 내게 특별했다. 한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맛있는 음식을 자주 만들어 주셨던 시아버님을 애도하며 보내드리는 장례식이기도 했지만, 남편을 향한 내 결심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마칠 때까지 남편은 울지 않았다. 눈시울이 빨개지는 것을 여러 번 봤지만, 끝끝내 울지 않았다. 핀란드에서의 장례식과 화장까지 마치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은 짐을 풀지도 못한 채, 옷 입은 그대로 잠시 침대에 누웠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양 눈썹 사이로 없던 주름 세 개가 패어 있었다. 참아내느라 고생했구나 싶었다. 잠옷으로 갈아입히는 동안에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저녁도 안 먹고 잠이 들었는데 그다음 날 아침도 점심도 건너뛰고 계속 잠을 잤다. 다음 날 늦은 밤이 돼서야 눈을 살며시 떴다가 또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하루를 통으로 잠을 잤던 남편은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밥도 씩씩하게 잘 먹고, 운동도 하고, 일도 평소와 같이했다. 근데 내 눈에는 그런 행동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둘째 날,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Are you okay? 괜찮아?' 묻자마자 후회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런 바보스러운 질문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착하게도 답을 해줬다. 'I'm okay. Don't worry.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며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셋째 날이 되었을 때, 유심히 남편을 살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청소하고 일을 만들어서 집안 전체를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청소기를 돌리던 그의 손을 잡고, 하던 일을 멈추게 했다.
'Stop for a while, babe. It's okay. It's just me. Don't try too hard. It's okay not to be okay. 잠깐만 멈춰봐 봐. 괜찮아. 그냥 여기 나뿐이잖아.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괜찮지 않은 게 당연한 거야.' 남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눈시울이 단숨에 빨개졌다. 그리곤 3시간 동안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남편을 만나 13년을 함께 하면서 남편이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와의 사별의 슬픔과 상실감에 나오는 통곡의 애도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울어. 많이 울어. 참지 말고 울어. 울고 싶은 만큼 다 울어. 내가 여기 있잖아.' 아버님의 사망 충격으로 감정적으로 멍한 상태를 지나, 2주일간의 극도의 피로감, 그리움과 슬픔을 잘도 참아왔다. 그런 남편이 너무나 안쓰러워 나도 같이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든든한 남편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내가 아버님만큼 정신적인 지주는 못 되어줘도 당신의 가장 든든한 응원자, 지원자가 되어 줄게!
남편은 항상 내게 든든한 지원군이자 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다.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에 파자마를 입고 있을 때 '오늘은 더 이쁜데! 난 세상에서 가장 이쁜 아내를 가지고 있어'라고 말해준다. 이 살가운 코멘트는 들어도 들어도 싫증이 안 난다. 이쁘게 한껏 꾸미지 않았을 때보다 하나도 꾸미지 않은 내 모습 그 자체로 그런 말을 해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내가 정말 아름다웠는지가 아닌가 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말 한마디로 난 내 모습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내가 타비의 '아내'가 아닌, 루카스의 '엄마'가 아닌 줄리, 나 그대로 '여자'임을 상기시켜준다.
내가 회사에 다니며 힘겨워할 때, 사업을 하며 지쳐 있을 때, 그는 항상 내게 'I'm your No. 1 fan.', 'I'm so proud of you'라고 얘기해준다. 이 세상에 찐 팬 한 명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내가 아등바등 멀고도 험한 목표를 향해 아기 걸음마 단계에 있을 때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호들갑스럽게 얘기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다. 육아로 지치고 힘들어할 때 'You are the best mom in the whole wild world'라고 얘기해준다. 내가 최고가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려주고 응원을 해준다는 것은 깜빡깜빡 방전돼가는 시점에서 순식간에 자체 에너지 충전 만빵이 된다. 내가 세상에서 최고의 엄마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내가 얼마나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알아주는 그의 맘이 한없이 고맙다. 남편은 그렇게 내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항상 흑기사가 되어주었다.
울고 있는 남편을 쓰다듬어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당신이 슬플 때, 괴로울 때, 병들 때, 가난할 때 내가 당신의 흑장미가 되어줄게!' 결혼식 때 했던 결혼 서약보다 비장한 각오가 선다. 결혼의 무게감을 더 깊이 느낀다. '걱정하지 마, 당신은 내가 책임져! 일어설 힘이 다시 생길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줄게. 외롭지 않게 내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줄게.' 다짐을 하고 또 한다. 그가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자신을 일으키는 힘이 생기도록 거들어 준다.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도록 영양가 있는 음식을 차려 동굴 안으로 넣어준다. 기분이 우울한 것 같을 땐 잔잔한 운율이 흐르는 피아노나 첼로 연주 음악을 동굴 입구에 틀어준다. 동굴 안에서 잘 있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가끔 바람을 쐬자고 가까운 바다나 산으로 산책하러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앞으로도 남편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그의 흑장미가 되어줄 거다.
흑장미의 꽃말은 '당신은 영원한 나의 것'이다.
나는 자진해서 기꺼이 남편의 흑장미가 되기로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한국의 상례 풍경과 핀란드의 상례를 뒤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핀란드의 장례식에서 차이점을 느낀 점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핀란드의 장례는 눈물이 적다. 한국은 고인이 돌아가시자마자 치러지는 장례지만 핀란드는 바로 치러지지 않는다. 한국은 가족들과 친한 지인들이 애통을 함께 나누고 눈물을 흘린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처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예의를 차린다. 핀란드의 경우, 고인이 돌아가신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후에 (몇 주에서 몇 개월까지 걸린다) 장례식을 해서 눈물이 적다. 각자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른 후에 모인다. 장례식에서의 가족들의 눈물도 소리 없이 흐느끼는 정도다.
둘째, 개인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장례식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공지되는 것이 있다. 장례식에서는 사진을 찍지 않도록 부탁하는 것이다. 장례식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어찌 보면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기억하고 싶은 날이 될 수도 있다. 장례식 동안 이뤄지는 고인을 위해 부르는 노래, 꽃을 관 주위에 놓는 일 등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전문 사진사를 고용해 장례식에 방해되지 않도록 멀리서 사진을 찍게 한다. 나중에 그 사진들을 장례식에 참여한 지인과 가족분들, 초대하지 못한 분들께 보낸다.
셋째, 고인과의 기억과 추억을 함께 이야기한다. 한국에서의 식사 시간은 좀 더 엄숙하며 테이블마다 작은 규모로 고인과의 기억을 나눈다. 핀란드에서는 장례식이 30~40여 분 정도 걸린다면 장례식 후의 일정은 3~4시간 정도로 훨씬 길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커피와 차를 마시며 한 사람씩 자신 소개를 하며 고인과 함께한 이야기를 모든 사람과 나눈다. 이야기를 꺼내며 울컥 울음이 올라올 때도 있고, 유쾌한 웃음을 자아낼 때도 있다. 이 시간은 돌아가신 분을 위한 시간이다. 떠나가신 분을 기억하고 상기하며 일부분을 보내드리는 시간이다. 시아버님은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셨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인 도움을 주셨고, 사랑이 넘치는 겸손한 분이셨다.
아버님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신 후 내 삶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봤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인가?
어떤 딸로 기억되고 싶은가?
어떤 누나/동생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어떤 아내로 기억되고 싶은가?
어떤 엄마로 기억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