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일이 꼬이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할 때 일단 분풀이할 대상을 찾았다.
맨 처음 분풀이 대상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다. '아! 다른 일도 많은데 이렇게 촉박하게 일을 던지면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겠냐?' 혼자 화를 낸다. 그러나 월급용 자아를 장착했기 때문에 채팅창에는 씩씩하게 느낌표도 붙여가며 "넵!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상황을 탓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이내 깨닫고 하던 일을 마저 한다.
일이라는 짧은 1음절 단어에는 시련과 역경이 있다는 내용이 생략된 경우가 많다. 수 차례 경험으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후 일을 받아들이지만 시련과 역경은 '요건 몰랐지?'라며 놀리듯 언제나 새로운 버전의 괴로움을 선사했다. 생각한 대로 좀처럼 일이 풀리지 않자 탄식과 함께 나지막이 나오는 말이 '왜 이렇게 일이 꼬이지?'이다. 이때부턴 분풀이 대상은 나 자신이 된다. '내가 능력이 부족한가?', '놓친 부분이 있나?' 되뇌며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쓴다.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뒤로 돌아가는 느낌만 드니 스스로 채찍질 하기 일수였다. 부정적인 생각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커리어)이 맞는 걸까?' 책상 서랍에 숨겨둔 퇴사 버튼을 찾기도 한다.
시계를 보면 어느새 오후 5시 50분. 일단 밥 먹고 하자라는 생각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할 팀원을 구한다.
"ㅇㅇ님, 저녁 식사하시나요?"
시간이 지난 후 그때 일을 돌이켜 보면 별거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물론 문제에 대한 완벽한 정답과 풀이를 알게 되어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고 올바르게 대처했다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진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떠한 일에도 요동치지 않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토 미스로의 <그네의 법칙>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터의 그네를 탔다고 생각해보자.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더 뒤로 물러나 발로 도움닫기를 해야 한다. 힘차게 발을 굴려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뒤로 돌아가기 위한 추진력을 얻고 있을 뿐이다.
그네를 타고 있는 본인만 느끼지 못할 뿐 사실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플러스 에너지와 마이너스 에너지만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얻은 것은 반드시 언젠가 잃고 반대로 잃은 것 또한 반드시 언젠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네를 탄 사람들은 그네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간에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네를 타는 태도를 바꾼다면 어떨까? 그네 전체를 보는 것 말이다. 그네 전체를 보면 올라가는 순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고, 내려가는 순간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땐 머리를 쥐어뜯으며 왜 안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다. 금방 이유를 찾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좀처럼 이유를 찾지 못하고 심연의 늪으로 빠지는 경우도 꽤 많다.
그러나 그네의 법칙에 의하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 자꾸만 일이 꼬인다면 이는 그네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네 전체를 바라보면 일이 꼬이는 순간은 일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다큐 3일>에 출연한 고물상 사장님의 인터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사람들은 늘 위만 바라보기 때문에 밑을 바라볼 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고물상 사장님도 인생을 알려면 위와 아래를 모두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 같다. 마지막 인생이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그냥 눈물이 나온다는 것은 깨달음의 눈물이 아닐까?
좋은 일, 즐거울 일, 행복할 일만 쫓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쁜 일, 슬픈 일, 불행한 일도 필연적으로 생긴 다는 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자.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는 것이 일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다 잘 되고 있는 것뿐이니깐. 안 되는 이유에 너무 사로잡히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