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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초 Jun 21. 2021

세상이 달콤한 게 아니라 쌉싸름할 때 찾는 새로운 취미

세상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었다.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고 원하는 바는 모두 이루던 그런 시절이었다. 계획형 인간이다 보니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목표와 데드라인을 설정했다. 그리고 대부분 어렵지 않게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맺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고 이를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웠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느껴질 때 공기의 내음도 다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빨려 들어오는 공기는 좀 더 달콤하다. 


하지만 이러한 달콤함은 영원할 리 없었다. 30살이 넘어 커리어 전환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면서 달콤함은 쌉싸름함으로 변하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왜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너무 늦은 나이에 리스크가 크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나이키 광고를 너무 많이 봐버렸다. 

나이키 <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 캠페인 중 일부

나라는 위대함을 믿고 그냥 해(Just do it)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달콤함은 쌉싸름함으로


커리어 전환 또한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실행에 옮기면 당연히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나의 오만방자함이었다. 확실히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경력이 쌓일수록 방향을 선회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스스로가 설정한 데드라인을 자꾸 초과하게 되었고 여유가 없어져 맘 편히 다른 것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노력이 부족해서 잘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노력>이란 단어가 자기소개서에서 금기어처럼 되어버리고 <노오오오력이 부족해>라는 풍자로 소비되면서 어느새 이 단어를 쓰는 것이 어색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한다. 노력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나라는 자동차를 움직이는 연료라고 생각한다. 연료가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무튼 생각만큼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노력이라는 연료를 더 많이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부하가 일어나면서 조급함과 욕심만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짜증이 많아졌다.


새로운 취미, 멍 때리기


지치고 힘들 때 재충전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떤다거나 여행을 가는 것도 또 다른 일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잠시 일탈, 회피 정도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공허함은 더욱 괴롭기만 했다.


이때 새롭게 찾아낸 취미가 멍때리기다.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있는 순간에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기며 오히려 생각들이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취지로 명상을 시도해보았으나 주위가 산만한 나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유튜브에서 명상 영상을 틀어놓은 후 눈을 감고 따라 하면서 머릿속에는 해야 할 일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멍때리기는 이것보다는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할수록 과잉집중에 시달리게 된다. 목표에 맞는 정보들만 눈이 보이게 되고 이 외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줄어들며 생산성을 저하시킨다. 무조건 집중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뿐만 아니라 멍때리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캠핑장에 가보면 장작불을 바라보며 불멍(불을 보며 멍 때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캠핑장 예약할 때 보면 불멍이라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추가 옵션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또 물멍(물을 보며 멍때리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강이나 바다에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집에 어항을 설치하고 그것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멍때리기는 윤슬을 보며 멍 때리는 것이다. 윤슬은 물 위에 비치는 햇빛이나 달빛을 의미한다. 순우리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어에 생소함을 느낀다.

 

한강의 윤슬


시간을 따로 내어 윤슬을 보러 갈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지하철에서 보는 윤슬이 가장 멍때리기 맛집이다. 지하철로 한강을 지날 때 꼭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특히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는 물속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볼 수 있다. 30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 것을 볼 때만큼은 세상의 근심 걱정을 덜어낼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은 아직도 아름답구나를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성공적으로 커리어도 전환했고 다시 여유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걱정과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 새롭게 만든 멍때리기라는 취미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멍 때리는 노하우가 있다면 의식적으로 멍을 때리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멍때리기 종류만큼 각자에게 가장 맞는 멍때리기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에 홀려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게 만드는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잠시 머리의 전원을 강제로 꺼버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바다의 윤슬


종종 주변에 머리의 ON/OFF 전원을 자유롭게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출근하면 일에 오롯이 집중하고 퇴근하면 일과 관련된 것들은 잠시 꺼둔 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잘 활용한다. 저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늘 부러웠다.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맘처럼 쉽게 되지가 않았다. 대신 멍때리기로 강제로 OFF 하는 방법을 배웠다. 앞으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ON/OFF 컨트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멍때리기를 진지하게 취미로 만들어보기를 추천한다. 꽤나 매력적인 취미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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