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 바람에 남긴 인사

30화-큰엉 해안 산책길

by 김경희

눈을 뜨자마자 테라스로 나갔다. 바람이 먼저 나를 안아주듯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일이면 이 집을 비우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은 짐을 싣느라 바쁠 테니 오늘 옆집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텃밭에 할머니가 나와 있을 것 같아 나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늘도 고사리를 꺾으러 나가신 건지. 빈자리를 바라보다 숙소로 들어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오늘의 발걸음은 남원, 숙소와 가까운 올레길 5코스, 큰엉 해안 산책길을 걷기로 했다. 남원 포구에 차를 세우자, 파도 소리가 부서지며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남원 바당 올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로 손꼽는 큰엉 경승지 산책길이 있었다. 큰엉 산책로는 남원읍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라지고 묻힌 바당 올레길 서너 군데가 더 복원되어 1.5km까지 이어져 있었다. 올레 길가엔 시인들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글씨가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듯 읽히고, 그 속에서 마음이 활짝 열렸다. 많은 시 중에 김생진 시인의 시 한 구절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아이들이 돌아가자 바다가 마을을 들여다본다.”

바다가 우리를 바라본다니, 이런 표현이 아련했다. 바다가 바라보는 건, 어쩌면 떠나는 우리일지도 모른다.


바람과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큰엉 산책길은 난대 식물들이 숲길을 이루고 있었는데 숲길은 고요했고, 나무숲 터널을 지나 바다가 열리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일 떠난다는 생각이 겹쳐져서 그런지 바다가 유난히도 더 푸르고 깊게 보였다. 절벽 아래 큰 구멍은 검은 입을 벌린 듯, 나를 불러 내렸다.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큰 엉의 수많은 바위 중 호랑이가 표효하는 듯한 모양을 가진 호두암, 엄마의 젖가슴을 닮았다는 유두암, 오랜 시간 제주의 바람과 파도가 빗어낸 인디언 추장 얼굴, 나무 사이로 그려내는 한반도 형상은 모두 제주의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바위들을 보며 걷는 해안 산책길은 나뭇잎이 켜켜이 쌓여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폭신했다.


산책로를 지나 바닷길을 걷다 보니 바람이 ‘휘잉’ 불어와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살짝 스치는 바람 속에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끝에 닿았다. 바위 위로 부서지는 물보라가 햇살에 반짝이며 흩뿌려졌다. 물방울이 팔과 얼굴을 적실 때, 마치 제주가 마지막으로 내 몸을 쓰다듬어주는 듯했다. 걸음을 멈추고 멀리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햇살의 반짝임, 그리고 바람이 속삭였다. '조금 더 이곳에 머무르면 안 될까?'


해안 길을 빠져나와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까지 걸었다. 걷는 길의 끝에서 우리는 공천표 식당에 들어섰다. 된장 물회가 유명한 집이었다. 숟가락을 떠 올리자, 시원한 바다 맛과 발효된 된장의 깊은 감칠맛이 입 안에 퍼졌다.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러드는 맛은 해안 길에서 느낀 파도, 바람, 햇살과 맞닿았다. 나는 눈을 감고 음미했다. 바람에 스미는 햇살, 흙냄새, 바다내음, 걸었던 길, 만난 사람, 맛본 음식 모두 내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언제나 더 많이 걷고 오길 원하던 남편이 오늘은 어쩐지 먼저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끝이 다가왔다는 압박감이 조용히 잡아끄는 듯했다. 이른 시간에 숙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옆집 할머니가 텃밭에서 서성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한 미소 속에 작별의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꺾어온 고사리를 삶아 널고 이제 꽃밭으로 나왔다고 했다. 꽃밭 앞에 서 있는 할머니는, 소녀처럼 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이와 나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저희 내일 떠나요.”

“아이고, 아쉬워서 어쩌누”

“건강히 지내세요.”

한 달이 어쩌다 이렇게 훌쩍 흘러가 버렸는지, 아쉬운 마음에 할머니 손을 덥석 잡았다.

“또 내려와요.”

할머니는 우리에게 그윽한 눈빛을 보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숙소로 들어와 제주에서 마지막 집밥을 먹었다. 싱크대 위 물방울이 ‘또로록, 또록’ 떨어지고, 화장실 환기창을 바람이 ‘후우’ 불고 지나갔다. 작은 소리마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나하나 정리하고 우리의 흔적을 지우며 묵었던 집과 작별할 준비를 했다. 밤이 깊어지니 창밖으로 바람이 불어대고, 멀리서 파도가 여전히 부서지며 속삭였다.

‘얼마나 더 부서져야 날 받아주겠니.’

하지만 이미 제주도는 내 곁에 있었다. 마음속에, 기억 속에, 오래도록 함께 머무를 것이다.


나는 조용히 창을 열어 바람에 인사를 남겼다

“고마웠어, 제주.”

바람은 잠시 멈추었다가 흩날리며 답하는 듯했다. 멀리서 철썩, 촤르르르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퇴직 후, 쉼이 필요했던 우리에게 제주에서 한 달은 선물이었다. 그동안 수고한 우리를 위해 바람과 햇살, 바다와 숲이 속삭이듯 휴식을 안겨주었다.


한 달 동안 걷고, 보고, 부딪히며 올레길에 대한 동경은 삶의 결을 읽는 눈으로 확장되었다. 귤꽃 향기 사이로 걸으며, 해안 절벽의 바람에 몸을 맡기며 나는 알게 되었다. 직접 걸어보지 않고서는 올레길의 숨결을, 직접 맞지 않고서는 바람 부는 땅의 결을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저벅저벅 걷던 발자국이 새겨진 제주에서, 비 내린 포구를 걸으며 흙냄새와 소금기 섞인 바람 속에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고단했던 마음이 흩어지고, 여유롭고 새로운 숨결로 다시 일어났다. 제주는 나에게 길이었고 쉼이었으며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이제는 점점 멀어질 제주를 바라보며 웃는다.‘한 달의 제주’ 너는 내 안에서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는 섬이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제주 한 달 살기의 마지막 밤도 어김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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