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마다 젖어드는 섬

29화-비밀의 숲, 송당마을

by 김경희

제주를 두고 가야 하는 마음이 벌써 이상해진다. 오늘 떠나는 날도 아닌데, 낯선 땅에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자꾸만 아쉬움을 몰고 온다. 새벽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젖어 들었다. 가랑비가 꽃밭을 적시고 테라스 마루를 적시며, 내 마음속 아쉬움까지 적셔주는 것 같았다. 제주 한 달 살기가 남긴 여운이 이렇게 깊을 줄은 몰랐다.


그 동안 올레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달 살기가 이어져 1년 살기가 되었고, 1년 살기가 이어져 3년째 제주에 눌러살고 있다는 세 쌍의 부부들. 처음에는 ‘뭐가 그리 좋아서’라는 생각과 함께, 옆집 부부처럼 돌아갈 집이 없는 사정 때문이거나 방랑벽 때문이겠지, 하고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안가의 출렁임, 비옥한 땅에서 솟아나는 식물과 생명, 어느 길을 가도 느껴지는 제주다운 공기와 분위기, 음식점마다 넉넉한 인심까지... 이 모든 것이 제주만의 매력이 되어,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올레길에서 쉬는 사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부부 중에 수십 억대 부자인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제주 한 달 살기를 하러 왔다가 3년째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더구나 도시에 많은 재산을 두고 제주에 와서 간간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지낸다고 했다. 그러다 쉬는 날 올레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들이 진짜로 부자인지, 가난한 자들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다. 길을 걷는 자들의 복장과 차림은 거의 비슷하니까 말이다.


제주 예찬론자들이 된 그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 좋아서 제주 살기를 3년씩이나 하고 있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이랬다. 제주에서 사는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삶이 가까워진다는 것, 시간과 마음이 느리게 흐른다는 것,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온몸으로 제주만의 풍경과 감각를 경험하며 살다 보니 도시에서 잊고 지내던 작은 행복과 여유를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이 느끼는 모든 것을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갔다.






남은 이틀, 우리는 제주에서의 시간을 사탕처럼 아껴 먹듯 소중하게 보내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부지런히 표선 민속 오일장으로 향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노점 간판 사이로 바스락거리며 걸음을 옮겨 붕어빵 하나를 입에 물었다. 이어서 찐 옥수수를 오천 원 주고 세 자루 샀다. 제주 감자와 당근, 카라향과 세미나 한 상자도 사서 차에 실었다. 떠날 준비를 하는 마음이지만 손에 든 작은 식재료 하나에도 제주가 녹아 있었다.

점심은 ‘광어다’ 표선점에서 광어 튀김과 광어 회덮밥을 먹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광어 튀김을 한 입 베어 물자, 입안에 바다 냄새가 스며든다. 창문 너머로 출렁이는 파도가 보이니 음식 맛이 더욱 살아났다. ‘쏴아아’소리를 내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새로웠다. 건물이 빽빽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바닷가만의 여유와 향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시간을 재촉하며 구좌읍의 ‘미밀의 숲’으로 향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가 제주를 감싸 안았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이 안개처럼 번지고, 비옷을 입은 우리는 가끔 ‘푸슉’하며 몸을 털고 걸음을 재촉했다. 비밀의 숲은 안달 오름 자락에 있었다. 입장료 3천 원을 내고 들어서자, 울창한 편백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선 길이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흙길을 밟으며 사각거리는 잎사귀 소리를 듣는 동안, 오르막과 내리막 없는 편안한 길은 마음속 긴장을 풀어주는 요람 같았다.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 아기 돌사진을 찍는 가족, 연인과 친구들이 ‘깔깔’ 웃으며 사진 찍는 소리를 숲이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간간이 비가 멎자 높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숲 향기가 숨을 들이마실수록 몸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숲길을 돌고 나와 넓은 초원으로 나오자,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푸른 들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편백 나무, 오두막과 유채꽃밭, 반짝이는 조명들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은 흐릿하지만 신비로웠다.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발걸음을 멈췄다.


초원을 빠져나와 송당마을로 들어서자, 끝없이 이어진 숲길 옆에 망초 나물이 즐비했다. 우리는 씻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하고 파릇한 망초 나물을 한 줌씩 뜯었다. 초록빛으로 물든 세상이 생명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나물을 뜯는 순간, 나는 잠시 제주도민이 된 듯한 착각에 젖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깊이 스며든 아쉬움이 ‘토닥토닥’ 내 마음을 두드리며,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제주 한 달 살기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느끼는 바람, 바닷물, 풀잎, 나무,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하나하나가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삶의 풍경을 다시 보게 했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아쉬움은 점점 깊어져 마음을 촉촉하게 적셨다. 그러나 이 아쉬움이야말로 제주가 주는 진짜 선물인지도 모른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나는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다시 올 것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귤꽃 향기, 파도 소리와 편백 향기, 송당마을의 작은 풀잎까지... 이 모든 기억을 다시 찾아, 이 섬으로 돌아오겠다. 그리고 그때는 이번보다 더 오래, 더 깊게 제주와 젖어 들겠다. 옆에 있는 그이의 눈빛도 내 마음처럼 푸른 약속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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