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올레길 8코스
나흘 후면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아서 느긋한 마음이었는데, 사흘 전부터 달력이 자꾸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처음엔 길게만 느껴졌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모래알처럼 순식간에 지나 버렸다.
아직 걸어보지 못한 올레길 코스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모든 길의 완주가 우리의 목표는 아니었으니 이 또한 욕심내지 않으려 한다. 다시 올지 모를 어느 계절에, 이 섬으로 내려와 이어서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이가 언젠가는 반드시 올레길을 완주하고 싶다는 걸 알고 나니, 제주의 길은 우리를 다시 불러낼 것만 같다.
살다 보니, 익숙함은 늘 비에 젖듯 소리 없이 스며든다. 지금 지내고 있는 표선면의 작은 집도 그렇다. 처음엔 불편했던 화장실, 좁은 개수대, 겨우 숨 쉴 공간을 내어주는 작은 냉장고, 이런 것들이 넉넉하게 지내던 삶과 달라서 불편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런데 시간이 쌓이자 이 모든 것이 익숙해졌다.
밤마다 남편과 마주 앉아 노트북 자판을 ‘딸깍딸깍, ’ 토닥토닥’ 두드리던 작은 식탁은 어느새 우리의 저녁을 밝혀주는 등불 같은 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젖어드는 데는 특별한 의식이나 다짐이 필요치 않았다. 그냥 시간이, 그리고 함께한 일상의 호흡이 모든 낯섦을 품어 주었다.
남은 며칠을 어떻게 써야 좋을까, 남편과 함께 의논했다. 그러다 오늘은 다시 길 위에 서기로 했다. 아침은 달콤한 귤과 부드럽게 찐 달걀로 간단히 요기하고, 8코스를 걷기 위해 자동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바람은 ‘슉슉’ 지나가고, 자동차 바퀴는 아스팔트 위로 도르륵 도르륵 굴러 나갔다. 8코스 시작점인 월평 아왜낭목 쉼터로 향하던 길에 엉또 폭포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핸들을 돌려 샛길로 들어섰다. 계획을 바꾸고 길을 벗어나는 그의 습성,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것도 함께한 세월이 우리 안에 남긴 또 다른 익숙함일 것이다.
엉또 폭포는 한라산 자락에 70mm 이상의 큰비가 내려야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라면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으나, 우리 앞에 서 있던 건 50m 높이의 기암절벽뿐이었다. 물이 비어 있는 절벽은 묵묵했고, 물줄기 대신 잔잔한 바람이 ‘솔솔’ 흘러내렸다. 그때 어디선가 황조롱이 한 마리가 날아올라 울부짖었다. “기익 끽, 기이이익” 독특한 울음소리는 마치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 폭포의 진짜 얼굴을 보려면 장마철에 다시 와야 한다네.’
아쉬움을 내려놓고 뒤돌아서는 길, 새의 울음이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렀다.
다시 차를 몰아 ‘동도원’이라는 향토음식점에서 따뜻한 한정식을 먹었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던 국물은 허기를 녹여내고, 향긋한 나물 반찬들은 제주 땅에서 솟아난 생명의 기운을 전해주었다. 배를 두둑이 채운 뒤에야 우리는 본래의 목적지인 8코스 시작점 아왜낭목인 쉼터로 향했다. 올레 패스포트에 도장을 ‘꾹’ 찍을 때 마음을 두근거렸다. 이제 걸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아쉬움이었다.
길은 늘 그렇듯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 주상절리의 단단한 바위틈을 스치는 파도 소리는 ‘쏴아아’ 하고 발끝을 흔들었고, 베릿내 오름으로 향하는 숲길은 사각사각 잎새 소리를 내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특히 귤밭 사이로 난 길은 환상적이었다. 작고 하얀 귤꽃송이들이 나무마다 가득 매달려 있었고, 바람이 불면 꽃잎들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코끝을 스치는 귤꽃 향기는 아카시아보다 더 짙고, 달콤해서 마음을 취하게 했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온몸이 향기에 절여지는 것 같았다.
8코스의 절반을 걷고 난 뒤 저녁에는 반가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오랜 친구 부부가 제주 한 달 살기를 하고 있었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이곳으로 흘러와 있었다니. 우연이란 때로 이토록 절묘하다. 우리는 천제연폭포 부근의 ‘어부촌’이라는 식당에서 만났다. 그들의 제주살이는 우리와는 달랐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지만, 그들은 푸른 잔디 위에서 공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은 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올레길을 걷지 않은 자, 제주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순간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 말속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길 위에서 느낀 바람, 돌담 너머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귤꽃 향기, 바다의 짠 내음... 이런 것들을 겪어내지 않고서는 이 섬의 속살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친구 부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기간엔 올레길을 걸어보리라 다짐했다. 우리가 가장 좋았다고 손꼽은 21코스는 당장 내일 걸어보겠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철썩, 철썩’ 부서지는 물결은 마치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장가 같았다.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걷는 동안 이 섬에 한 걸음씩 젖어들고 있었구나.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했지만, 이제는 작고 사소한 것까지 정겹게 다가왔다. 젖어든다는 건 시간을 건너야만 얻을 수 있는 은혜 같은 것이다.
나흘 뒤면 떠나야 하지만, 이 섬의 향기와 바람과 소리는 이미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길을 따라 걸었던 발자국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도 분명히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길로 돌아와 그 흔적을 따라 이어 걷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