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비 오는 날 집콕하며
비가 내린다. 단순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등에 업고 하늘로부터 곤두박질치듯 쏟아진다. 이제껏 제주에서 만난 비는 이슬비처럼 살며시 다가왔는데, 오늘의 빗줄기는 제 몸을 내던지 듯 거세고 충만하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로선 투둑거리며 내리는 빗소리가 반가웠다. 빗방울이 흩뿌려지는 순간, 세상은 잠시 멈추어 서고, 마음 깊숙이 쌓인 먼지까지 씻겨 내려가는 듯했으니까. 그러나 남편의 눈빛은 달랐다. 오늘은 한라산 둘레길을 걸으려던 날이었는데 기대가 무너지자 아쉬워했다.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은 주저함 없이 들이닥쳤다. 얼굴 위로 미세한 물방울들이 가득 달려들었다. 마치 하늘이 내게 미스트를 뿌려주는 듯, 피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화단을 바라보니 계절을 모르고 피어난 키 작은 코스모스와 한련화, 백합, 방울토마토 꽃까지 빗방울을 이고 무거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축 늘어진 듯 보이면서도, 빛을 머금은 구슬들이 꽃잎마다 매달려 있어 영롱했다.
화단에서 돌아와 물기에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선배 언니였다.
“낭만을 실행하는 중이고만, 멋진 사람! 나도 3월에 우도 다녀왔는데 사진 몇 장 보낼게.”
짧은 메시지 속 단어 하나가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인 순간을 즐기는 태도라 하지만, 정작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낭만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타인의 눈에 비칠 때 낭만은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멀리서 보면 우리 부부의 한 달 살이 또한 낭만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매일같이 이어지는 질문들이 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먹어야 할까. 걷느라 발바닥이 부르트고, 발목이 욱신거리는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온다. 낭만은 언제나 멀리 있는 풍경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잠시 서울로 간 옆집 부부를 처음 만났을 때, 제주 1년 살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참 낭만적인 부부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출렁였다.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나 역시 제주에서 긴 시간을 살아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이 일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낯선 땅에 몸을 담그기엔 충분히 길지만, 여전히 여행자의 눈빛을 지우기엔 모자란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은 전혀 다르다.
1년 살기를 하게 되면 섬의 사계절이 고스란히 담긴다. 봄이면 바람결에 실려 오는 유채꽃의 황금빛 향연 속에서 아침마다 새싹이 돋는 기쁨을 맞이하고, 여름이면 장맛비에 갇혀 눅눅한 집 안 공기를 버티며 해무에 젖은 제주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면 억새가 바람에 넘실거리는 들판을 지나며 깊어가는 계절의 쓸쓸함을 배우고, 겨울이면 바닷바람이 매섭게 몰아칠 때 방안을 데우며 소박한 온기 속에서 삶의 무게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계절의 고비마다 변하는 섬의 숨결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살아낸다면, 비로소 제주의 맥박과 호흡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더욱 낭만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부부의 그다음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은 낭만과는 멀었다.
이들 부부는 결혼한 아들 내외에게 집을 신혼집으로 내주고, 매해 세를 내며 제주에서 3년째 살고 있다는 사정이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삶. 그들의 ‘제주살이’는 낭만이 아니라, 견뎌내야 하는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들의 사정을 알고 나니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낭만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실체 없는 허상이었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나는 책 한 권을 끼고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활자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제주의 공기, 창밖에서 흔들리는 소철 나무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무들이 바람에 휘청이며 고개를 흔드는 모습은, 어쩔 수 없는 흔들림 속에서도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하는 우리네 삶의 여정과 닮아 있었다. 흔들림조차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마음이 낭만에 닿을지 모르겠다.
점심에는 주인집에서 소개해준 흑돼지 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불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에 잠시 입맛을 다셨지만, 곧 불편한 배부름이 남았다. 밥 먹는 시간에도 남편은 혹시나 빗줄기가 그칠까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으나, 빗소리는 더욱 무겁게 쏟아졌다. 결국, 그는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주에서 또 한 권의 출판 계약이 이루어져 분주한 마음으로. 그에게 제주 한 달 살기는 낭만보다는 현실의 무게가 더 크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생각했다. 낭만과 현실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빗줄기 안에서 동시에 빛나는 두 얼굴이 아닐까.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도, 문득 찾아오는 작은 기쁨의 순간이 있다. 얼굴 위에 스며드는 빗방울,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자, 책상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고요.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순간순간 붙잡을 수 있는 낭만이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낭만이 아니라, 내가 직접 체감하는 이 순간의 낭만 말이다.
하루 종일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가 묻는 듯했다.
'네가 찾는 낭만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대답했다. 낭만은 멀리 있지 않다고. 남들이 바라보는 섬의 풍경 속이 아니라,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에,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의 숨결에, 풍경을 바라보는 사소한 순간 속에 숨어 있다고. 나의 낭만은 먼 이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순간순간 번져오는 밋밋한 빛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