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올레길 7코스
제주 1년 살기를 하고 있는 옆집 부부가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났다. 이번에 올라가서 처리하고 와야 할 일이 많다며,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이 이들 부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날이었다. 그들은 테라스 난간 위에 올려두었던 화분을 조심스레 화단 앞쪽으로 옮겼다. 돌아올 때까지 옆집 할머니에게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아침 공기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들 부부는 차에 짐을 싣고 나서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세요. 그리고 잘 가세요.”
그들의 짧은 인사 속에 이별의 아쉬움이 연하게 묻어났다. 서로의 손을 잡는 순간, 그동안 쌓인 정이 마음속에 잔잔히 남았다. 그들의 차가 떠나자 떠나보내는 마음이 몰려왔다. 남겨진 나는 빈자리 앞에서 그들이 가꾸던 화분에 물을 주고, 잎사귀 하나하나를 살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말이다. 삶이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는 것이니 어찌하랴. 아쉬움일랑 걸으면서 얼른 날려 보내는 수밖에.
아침부터 옆집과의 이별로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붙잡으며 오늘은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무계획 주의자들인 우리는 자기 전이나 아침에 눈을 뜨면서 서로에게 묻는다. "어디로 갈까?" 그제야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이다. 오늘은 옆집 때문에 조금 늦게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우리는 다시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지난주에 6코스까지 걸었으니, 오늘은 7코스를 이어가기로 했다. 집을 나서자 아침 햇살이 어깨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7코스 길 위에는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가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과 무기로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문장이 마음 한쪽을 파고들었다. 데모의 현장 같은 길을 지나 서근도로 향하는 길은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서근도는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한 달에 열 차례 정도 길을 드러내는 섬이었다. 오늘, 바다는 그 길을 우리에게 허락했다. 평소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길 위에서, 나는 발걸음마다 자연의 숨결을 느꼈다.
서근도에서 이어지는 길에 강정천이 있었는데 그곳은 은어 서식지로 유명한 맑은 하천이었다. 물줄기는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일렁였고, 차가움이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듯했다. 여름이면 제주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며 즐겁게 놀던 곳이라고 한다. 강정천을 지나 걷는 길 위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삶, 그리고 바람의 흔적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이어지는 대청 9경 안강경 노을길은 공사 중이라 마을 길을 돌아 나와야 했지만, 오히려 이 우회로가 주는 작은 발견과 여유가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며칠 동안 걷지 않아 흐트러진 내 걸음도, 오늘 다시 걷는 동안 안정과 리듬을 되찾았다. 발끝마다 스며드는 바람, 파도 소리, 먼 하늘의 구름이 내 마음에 쉼표가 되어주었다.
안강경 노을길을 돌아 나오는 길에 감귤 농원에 들렀다. 신록이 물든 나무 사이로 작은 꽃봉오리와 연한 잎사귀가 다정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카라향 감귤 한 박스씩 보내기로 했다. 양쪽 형제 모두에게 보내느라 총 여덟 박스를 담았다. 손끝에 남는 감귤의 촉감과 은은한 향이, 오늘 하루 걸음마다 스며든 여운과 어우러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하늘은 맑고 높았다. 오늘 하루 발걸음마다, 마음에 담은 풍경마다, 삶의 의미와 인간관계의 섬세한 결이 스며들었다. 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성숙해졌고, 작은 여유 속에서 삶의 깊이를 다시 한번 느꼈다. 발끝에 남은 여운과 마음속 잔잔한 파문을 안고, 오늘의 길은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성찰을 선물했다. 결국, 길 위에서 배운 것은,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살피며,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삶을 평화롭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사실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옆집 할머니가 허리를 구부리고 화초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옆집 부부가 서울에 가서 오늘 심심하셨겠어요.”
“에이 괜찮아. 두어 달 전에도 다녀왔는데 뭘, 같이 있어도 좋은데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살아가야 하니까 받아들여야지.”
허전한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억누르는 할머니를 보며 무거운 미소를 짓는 순간, 연륜의 지혜와 함께 삶의 단면이 마음속에 잔잔히 남았다. 나는 문득 고사리를 건네던 할머니의 손길이 생각이 나서 숙소에 들어가 책 한 권을 가지고 나왔다.
“이거, 제가 쓴 책이에요. 읽어 보실래요?”
“어머나. 나 책 읽는 것 좋아하는데 고마워서 어쩌누.”
“사실, 짐을 줄이느라 딱 한 권밖에 가져오질 못해서 옆집 부부 계실 때 드릴 수 없었어요. 다 읽으시면 옆집에도 전해주시던가요.”
“그래요. 내가 먼저 읽고 전해주리다.”
작은 것의 주고받음 속에서 사람과의 인연, 그 속에서 배우는 작은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곧 삶의 깊이라는 사실을 다시 느낀다.
낮에 참돔회와 함께 전복, 해삼, 멍게, 소라, 낙지까지 먹어서 그런지 어둑해지는 시간까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연한 된장국을 끓여 밑반찬에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니, 오늘 느낀 모든 순간이 마음속에 조용히 쌓였다. 떠나는 이들의 아쉬움, 남겨진 자들의 허전함, 올레길에서 마주한 자연의 생기, 강정천의 맑은 물줄기, 감귤 농원에서 마음을 보내는 기쁨까지. 이 모든 것이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냈다는 증거이자,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