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제주의 서쪽 구경하기
그이는 어제 혼자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체력과 내 체력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배려하지 못한 채 걸음만 재촉했던 것이 미안했다고. 그 말에 나는 웃음 섞인 고개를 끄덕였다. 걷는다는 것이 단순히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맞추어가는 과정인데 그것은 함께 걸어야만 깨닫게 되는 법이다.
오늘은 그이가 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걷기를 잠시 내려놓고, 제주 서쪽을 자동차로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자고 했다. 그이의 마음 씀씀이에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약한 체력 때문에, 국토 대행진까지 다녀왔던 걷기 대마왕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현실이. 하지만 어찌하랴. 서로 맞추어가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이고, 더구나 우리는 관계의 미학을 반드시 깨우쳐야만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는 부부이니 말이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러 와서 차차 실감하는 점이 있다. 부부란 서로의 속도를 이해하고, 때로는 욕구를 잠시 내려놓으며 상대의 필요와 마음을 헤아리는 존재라는 것을. 꼭 함께 같은 길을 걸을 필요는 없지만, 서로의 길이 맞닿는 순간에는 마음이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것을. 서로의 존재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그 속에서 삶의 균형을 배운다는 것을.
부부란 결국 서로의 부족함과 강점을 마주하며, 조용히 공존하는 예술가와 같다. 한 사람이 빛나도록 돕고, 다른 한 사람의 그림자를 감싸 안으며,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조화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넓어진다.
속도를 조절하고 여유로운 걸음을 내딛는 시간 속에서,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생각하는 정원’이었다. 이름처럼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잘 다듬어진 분재와 정성스레 쌓아 올린 돌담 사이를 거닐다 보니, 작은 나무 한 그루에도 누군가의 긴 세월과 기다림이 배어 있음을 느꼈다. 생명이란 원래 그렇게 오래도록 돌봐야 비로소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조급한 마음으로는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천천히 쌓이고 길러지는 힘. 나무 앞에 서 있는 순간, 내 삶도 누군가의 인내와 기다림 속에 여기까지 자라온 것 같았다.
정원을 나와 길을 달리다 보니 귤밭이 나타났다. 계절은 4월, 귤이 열리기에는 이르지만 이미 나무마다 작은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귤나무마다 하얀 꽃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고, 창문을 열자 바람에 실려 은은한 향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귤향은 아카시아향과 비슷했는데 더 진하고 달큼했다.
열매가 맺히기 전, 꽃으로 먼저 세상에 인사를 건네는 귤꽃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삶도 어쩌면 저 귤꽃과 같아서, 무언가를 이루기 전에 이미 향기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꼭 열매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과정 그 자체가 이미 삶의 선물일 수 있다는 것을, 귤꽃이 은근히 알려주고 있었다.
두 번째로 향한 곳은 환상의 숲, 곶자왈이었다. 숲길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흙냄새와 이끼 냄새, 오래된 나무가 내뿜는 숨결이 뒤섞여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곶자왈은 용암이 굳어 이루어진 땅 위에 뿌리를 내린 숲이다. 척박한 땅 같지만, 그 속에서 나무들은 억세게 살아남아 자연스럽게 서로 기대고 엉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삶도 불완전한 조건 위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완벽하지 않아도, 흠집이 있어도,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 서로 기대어 숲이 되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숲은 그 사실을 조용히 일깨웠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카페에 들렀다. 창가 자리에 앉아 망고주스와 생강 라테를 주문했다. 잔에 담긴 색감부터가 눈을 즐겁게 했다. 노란빛이 유난히 싱그러운 망고주스를 한 모금 머금으니 입안 가득 열대의 햇살이 퍼지는 듯했고, 생강 라테는 은은하게 매운맛이 속을 따뜻하게 풀어주었다. 서로 다른 맛을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며 우리는 모처럼 한가하게 앉아 있었다. 사실 성실하게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그이와 달리 내가 즐기고 싶은 것은 이런 시간이었다. 여유 있고, 낭만적인 느림의 시간. 남들이 보면 게으름과 나태함 사이의 중간 지점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때로는 유유히 흘러가는 데로 흐르는 것이 좋다.
카페에 앉아 묵묵히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들녘, 그리고 저 멀리 바다가 가만히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며 문득 느낀다. 삶은 늘 거창한 도전이나 성취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고, 향기를 맡고, 숲의 기운을 느끼고, 찻잔 속의 따뜻함을 음미하는 순간에도 인생의 진실이 숨어 있다. 오늘 하루는 멀리 걷지 않았지만, 그 대신 마음은 길을 걸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발걸음마다 채워지는 길이라면, 마음의 풍경은 사색마다 넓어지는 길일 것이다.
저녁이 가까워져, 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일몰을 봤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바다 위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마치 작은 여행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의 짧은 인생 수업 같기도 했다. 정원의 나무가 말해준 인내, 귤꽃의 향기가 전한 과정의 의미, 숲이 보여준 공존의 지혜, 그리고 한 잔의 차가 알려준 따스한 위로. 그것들은 모두 삶의 조각이 되어 내 마음에 수를 놓았다.
많이 걷지 않고 여러 곳을 잠깐씩 머물렀던 하루였지만, 오히려 그 머묾 속에서 더 멀리 걸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그이의 배려 덕분에 내가 배운 것은, 인생은 결국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 하나하나가, 우리의 가슴속에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