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그이는 걷고 나는 집에서 보낸 하루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오늘은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매일 걷는 길이었지만 오늘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들 내외가 와서 며칠 걷지 않았기 때문인지 리듬이 흩어진 것 같았다. 또 무릎과 발가락이 은근히 아려와 더는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기로 했다.
반면 남편은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그에게 체력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내가 집에 남겠다고 하자, 걸음을 멈추고 집에만 있기에는 제주에서의 시간이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어디로 갈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배낭을 메고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다 아쉬웠는지 같이 가기를 원했다. 혼자 두고 가려니 마음에 걸린다는 말이 고마웠지만, 혼자 집에 있어도 정말 괜찮다며 그이의 등을 떠밀었다.
현관문을 나서면서도 자꾸 뒤돌아보는 그이를 보며 올레길을 걷는 건 우리 둘이 암묵적 약속을 한 거나 다름 없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걷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내 마음을 재차 확인한 그이는 혼자라도 제주 어딘가, 발길 닿는 대로 둘러보고 오겠다며 헛웃음을 남기고 멀어져 갔다. 배낭을 메고 걷는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씩씩했다.
그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람마다 자신을 회복하는 방식이 다른 법이라고. 그는 걸음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나는 글로써 나를 붙잡는다. 오늘 하루는 걷지 못하는 대신, 글로 걷기로 했다. 작은 방 안에서 키보드 소리를 발걸음 삼아, 내 안을 오가는 생각들을 길 위에 흩뿌리듯 적어 내려가기로 했다.
조용한 공간에 혼자 남겨지니, 오히려 내가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열리는 듯했다.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으로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렸다. 방 한 칸뿐인 집이라 치울 것이 많지 않아 청소는 금세 끝났다. 단정해진 방 작은 탁자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내게 또 다른 길이었다. 걷는 대신 문장을 이어가며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생각을 다듬는 방법이었다.
점심 무렵, 테라스를 지나 텃밭으로 나가니 옆집 할머니와 아줌마가 풀을 뽑고 있었다. 매일같이 뽑아도 잡풀은 다시 자란다며 손끝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건넸다.
“고사리 먹을 줄 알아요?”
나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 직접 따온 고사리 한 움큼을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제주에 살러 왔으면 이 맛은 보고 가야지.”
섬의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마음이 손끝에 묻어 있었다. 할머니의 정이 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이 섬에서의 시간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삶을 잠시 옮겨놓은 것이고, 그 속에서 사람들과 얇지만 분명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간단히 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키보드 위에 손을 얹는 순간, 아침부터 이어진 장면들이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왔다. 청소할 때 나던 청소기 모터 소리, 텃밭에서 들려오던 흙 긁는 소리, 그리고 따뜻하게 건네받은 고사리 한 움큼까지. 글은 삶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작은 순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스쳐 가는 장면일 수 있지만, 글로 붙잡아두면 그것은 곧 나의 세계가 되고 하루의 증거가 된다.
한참 동안 자판을 토닥거리다 보니 어느덧 시계는 오후 네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에게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다시 걸고 또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열 번이 넘도록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신고라도 해야 하나 망설이던 순간,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귀포 여고 앞인데, 데리러 올 수 있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장 갈게.”
그런데 이내 그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집 앞에 다 왔어.”
순간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걱정은 순식간에 바람처럼 흩어지고, 마음에는 고요한 파문만 남았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그이와 따로 지냈다. 나는 걷지 못한 대신 글로 하루를 채웠고, 걱정과 안도의 파도가 오가며 마음이 조금 더 여문 것 같았다. 아이들이 떠난 뒤 텅 빈 자리를 걸음으로 채우지 못한 날, 나는 글로 걸었다.
매일의 발걸음이 이어지지 못하는 날도 있고, 문장이 더디게 흘러가는 날도 있다. 그러나 결국 삶은 멈추지 않는다. 걷다 보면 흐름을 찾게 되고, 쓰다 보면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다. 걷지 못한 발걸음은 문장 속에서 이어지고, 쓰여진 문장은 다시 내일의 걸음을 준비시킨다. 중요한 것은 쉼 없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멈추고 머물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멈춤과 이어짐, 걷기와 글쓰기, 채움과 비움이 교차하며 인생은 흘러간다. 어쩌면 나의 삶은 늘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이는 오늘 길 위에서 몸을 단련하고, 나는 글 속에서 마음을 다독이며, 우리는 오늘 따로 또 함께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