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이오테오 해변, 올레길 16코스
“올 때는 반갑고, 갈 때는 아쉽다.”
어머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오늘따라 더욱 마음 깊이 울렸다. 아들 내외가 떠나는 날, 아침부터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몸이 한 박자 느리게 따라왔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서둘러 숙소를 나섰지만, 마음은 이미 공항의 활주로 위로 날아가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출근 시간과 겹친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밀려 있었다. 어젯밤, 며느리가 조심스레 말했다.
“고사리육개장을 먹고 가고 싶어요.”
며느리의 말에 따라 오늘의 첫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서둘렀다. 작은 바람 하나라도 이루어주고 싶은 마음이 아침 공기 속에 섞여 흔들렸다.
고사리육개장으로 유명한 우진해장국 집에 들어서자 따끈한 국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가게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고사리와 부드러운 고기가 듬뿍 들어간 육개장이 앞에 놓이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물 위로 며느리와 아들의 미소가 번졌다. 작은 욕구 하나를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떠나는 아쉬움이 잠시나마 덜어지는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아 공항으로 향했다. 도로는 여전히 붐볐지만, 창밖 풍경은 그리움이 섞인 마음을 담아 유유히 흘러가는 듯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쉬움이 밀려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방을 함께 들고 터미널로 걸어가면서 나는 몇 번이고 아들의 손을 잡았다. 수속을 마친 아들 내외가 출국장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가고 싶은 마음과 여기서 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뒤섞였다.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그이가 어서 이오테오 해변으로 가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이오테오 해변은 제주도민들이 맨발로 걸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신발을 벗고 파도를 맞으며 해변을 걷고 있었다. 나는 원래 신발 벗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발이 젖거나 모래가 발가락 사이에 끼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도 걸어보자”라며 손을 내미는 그이를 따라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구름 낀 하늘 아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몰아쳤지만, 모래 위에 내딛는 발과 발목을 파도가 스치자 마음 한편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미세한 촉감 하나하나가 마음 깊은 곳을 간질였다. 아이들을 떠나보낸 공허함과 그리움을 파도와 모래가 조금씩 베어무는 것 같았다.
눈앞의 바다는 잔잔했지만, 마음은 이미 어딘가 먼 하늘을 향해 떠 있는 듯했다. 10시 반쯤, 아들 내외가 탄 비행기가 해변 위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아이들에게 보냈다.
“야호, 너희가 탄 비행기 봤다!”
며느리한테 냉큼 답장이 왔다.
“어머니, 신기해요. 즐겁게 지내다 오세요.”
"잘 가렴!, 늘 즐겁게 지내고."
서둘러 답장을 했지만 기지국 사정권을 벗어난 탓인지 더 이상 회신은 오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눈앞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마음은 허전했다. 그래도 아들 내외가 탄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볼 수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 이오테오 해변으로 나를 이끈 그이의 마음이 고마웠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 나도 모르게 맥이 빠지고, 숨결이 무겁게 느껴졌다. 드는 사람은 몰라도 나는 사람은 안다는 말처럼 함께 있던 존재의 부재는 공간의 온도를 순식간에 바꾸는 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까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던 내가, 오늘에서야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찾아왔다.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의 온기와 웃음이 공허 속에서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 보자며 그이가 16코스의 짧은 구간을 걷자고 했다. 올레길 페스포트에 도장을 찍고 16코스의 초입을 지나자 청보리가 가득한 밭이 바람에 흔들리며 파도처럼 출렁였다. 바람에 부딪히는 청보리의 촉감과 소리는 마치 아이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며칠 걷는 것을 쉬어서 그런지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은 가벼웠다. 떠난 아이들을 생각하며 걷고 있는 길, 이 모든 풍경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여러 번 멈춰 섰다. 멀리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청보리밭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릿결을 맡기기도 했다. 손끝과 발끝, 온몸으로 느껴지는 자연의 감각들이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했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며, 마음속 작은 울림으로 퍼져 나갔다.
광령1리사무소 주차장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나와 점심을 먹었다. 채식 뷔페에서 천천히 접시를 채우며, 마음속 공허를 음식으로 잠시 달래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정 5일장에 들러 토마토, 도넛, 삶은 옥수수를 사들였다. 길 위에서 걸었던 발걸음이 마음속 파동을 서서히 달래주었다.
오늘 걸은 걸음은 16,790걸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함께 스며 있었고, 때때로 스치는 바람과 햇살 속에서 잠시 느낀 평온마저 길 위에 고스란히 남았다. 눈앞의 풍경과 마음속 기억이 뒤섞이며, 걸음마다 지나온 시간의 온기와 사랑이 함께 흔들렸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는 이미, 다음 만남을 기다리는 설렘과 작은 기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길 위를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지나온 날들의 흔적과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대한 기대가 섞여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아쉬움이 쌓여 있다. 삶이란 결국 놓아주는 마음과 받아들이는 마음의 균형 속에서 빚어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잠시 느낀 평온 모두가 삶의 일부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지나간 시간에도, 떠나간 사람에게도,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 더 온전히 감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