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먹고 마시며 쉬었던 날들
아침 공기는 차분했고, 제주의 길들은 이슬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이가 오늘부터 이틀 동안은 아들 내외와 함께 지내기 때문에 걷지 못하니, 이른 시간에 숙소 주변을 산책하자고 했다. 4코스 중간 지점인 바닷길은 안개가 옅게 깔려있었다. 풀잎마다 맺힌 이슬은 작은 돌과 흙길을 적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부드럽게 맞이해 주었다.
십 분쯤 걸었을까. 멀리서 아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른 새벽 조깅을 나선 모양이었다. 안갯속에서 뛰는 녀석의 모습은 흐릿했지만, 젊고 든든한 발걸음은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며 흙길과 풀잎 위를 스쳤다. 이런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걷고 있자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숨죽인 숲과 안개, 젖은 흙과 풀, 그리고 아들의 존재가 어우러진 순간은 조용하지만 소소한 행복의 결을 만들어냈다.
점심때가 되어 며느리가 좋아하는 봉이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가게 문을 열자 진한 육수 향과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좁지만 아늑한 내부, 목재로 된 테이블마다 정겨운 접시들이 놓여 있고, 가게 한쪽 벽에는 주인장의 손글씨로 적힌 메뉴판이 푸근하게 다가왔다. 뽕잎이 들어간 커다란 김밥은 한입에 넣기 어려울 만큼 큼직했고, 보말죽을 먹으니 바다 내음이 입안에서 잔잔히 퍼졌다. 전복 냉칼국수와 양지 칼국수까지, 한 상 가득 펼쳐진 음식들은 단순한 한 끼를 넘어 마음의 온기처럼 우리를 감쌌다. 젓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웃음과 감탄을 주고받는 동안, 식탁 위에는 평범한 일상이 주는 작은 행복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든든히 배를 채운 뒤, 차를 몰고 가시리 녹산로로 향했다. 길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밭은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노란 물결을 만들어 내고, 멀리 솟은 풍력발전기는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채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맞이하고 있었다. 낮게 드리운 구름은 솜이불처럼 부드럽게 흘러가고, 차 안에서는 창밖 풍경만큼이나 따뜻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이에 대한 계획, 의료파업 여파로 결정해야 할 아들의 진로, 함께하지 못한 딸 내외에 대한 그리움까지 말 한마디, 웃음 한 자락이 우리의 시간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작은 카페는 창가마다 작은 조명이 깔리고, 커피 향이 아늑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은은한 소리가 커피 향과 어우러져 마음을 부드럽게 감쌌다.
저녁에는 집에서 옥돔 매운탕과 옥돔구이, 양념게장, 망초 나물을 차려 먹었다. 좁은 주방이지만, 한 접시 한 접시에 정성을 담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설거지를 맡은 며느리 곁에서 나는 정리를 거들며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감사와 즐거움만 있다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맞이한, 아들 내외와 함께 지내는 마지막 날. 아침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과와 토마토, 파프리카 반쪽씩을 작은 접시에 담아 손수건으로 곱게 싸서 건너편 숙소에 묵고 있는 아들 내외에게 건넸다. 소박하지만 정성 담긴 한 접시에, 함께한 시간의 따뜻함과 깊이가 고스란히 담기기를 바라며.
점심에는 올레 상설시장에 가서 갓 튀겨낸 크로켓을 나눠 먹고 유명한 김밥집에 가서 김밥 한 줄씩 집어 들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군것질로 대신한 점심이었지만 부족함은 없었다. 오히려 그 소박함 속에서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아들 내외 덕분에 젊은이가 된 듯한 착각이 일었으니 말이다.
잠시 드라이브를 마치고 들른 카페는 마치 조용한 숲 속 오두막 같았다.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은은히 바닥과 테이블 위를 감쌌고, 따뜻한 조명이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커피 향이 공기 속에 스며들어 코끝을 간질였고,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한참 동안 시시덕거렸다.
피로가 몰려오는 시간에 마사지 숍에 들렀다. 문을 열자 은은한 조명과 아로마 향이 공간을 감싸고, 잔잔한 음악이 귀를 적셨다. 소파에 앉아 발을 맡기자 따뜻한 물로 먼저 발을 적셔주었고, 촉촉함과 온기가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숙련된 손길이 발바닥을 부드럽게 눌러주고 지압할 때마다 오랜 긴장이 풀리며 몸이 가벼워졌다.
저녁에는 제주 흑돼지 삼겹살을 먹기 위해 음식점에 들어섰다. 숯불이 은은하게 달궈진 테이블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주방과 홀을 가득 채웠다. 살짝 불에 그을린 삼겹살을 한 점 집어 소금과 함께 베어 물자,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고기와 술, 그리고 가족의 손길과 말이 어우러진 시간은 작은 테이블 위에 온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아들 내외는 제주에 여행 온 것이 아니라 부모 집에 들른 것 같다며 웃었다. 그 말은 낯선 제주를 단숨에 우리에게 친근한 공간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함께 머물며, 소소한 순간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가족 간에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제주에서 마지막 밤을 맞이하는 아들 내외와 숙소로 돌아와 자정이 훌쩍 넘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한 제주에서의 요 며칠은 내 삶의 빛나는 페이지가 되었고, 바람결에 흩날리던 유채꽃의 노란 물결처럼, 창가에서 피어오르던 커피 향처럼, 오래도록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모든 감정과 모든 순간이, 내 마음 안에서 은유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